한 해 동안, 감사했습니다.
저는 대학을 두 번 다녔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어느날 갑자기 나라를 바꾸고, 2년차에 접어든 이종범 선수가 그라운드 위를 날아다니던 1994년, 저는 한국외국어대학교(태국어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던 당시에 저는 종교에 빠졌습니다. 첫 번째 대학 생활 내내 제 꿈은 '선교사'였을 정도로 미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지요. 자신을 완전히 희생시켜야 하는 선교사가 뭔지도 모르고 하겠다고 생각했던 제가요. 여하튼, 종교에 제대로 미쳐 있었기 때문에 그 꽃다운 열아홉에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 봤습니다. 성경 공부, 수양회, 기도 모임에 열심히 좇아 다녔던 기억이 전붑니다.
제가 몸 담고 있었던 선교단체가 이단/사이비는 아니었지만,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신학을 따르는 '꼴통 단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큰 충격을 받고 도망치듯 단체를 그만 두었습니다. 어차피 나올 거라면 빨리 나왔어야 했는데, 4학년이 되고 제 삶이 박살난 후에야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40대 중반이 되었는데 아직도 나오지 못한 대학 동기도 있거든요.) 한창 젊은 스물 네살 여름에 학교마저 그만 두고 찌는 듯한 제 방 안에 저 자신을 가두었던 기억이 납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막막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군 입대였습니다. (군대에 감사합니다. 저를 받아 줘서요.)
2000년 초에 전역했습니다. 대학 생활을 그만 두었기에, 저는 그냥 '고졸'이었습니다. 놀고 먹을 수는 없기에 신문을 돌렸습니다. (하루에 250부를 돌리면 1부에 100원씩 쳐서 25만원 정도를 월급으로 받았습니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공부를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대학을 다시 가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5년이 넘어서 내신 성적 계산 등 여러 모로 불리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다행히 성적이 나쁘지 않게 나와서 제가 원하던 학교(성공회대학교)에 안전하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군 시절부터 생각해 두었던 사회복지학과에 들어갔습니다. 방황 끝에 선택한 일은 남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맞이한 대학 생활에서는 세 가지 활동에 집중했습니다. 첫째로 학과 공부. 고3 시절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말한다면 믿으실까요? 덕분에 제 성적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마음 놓고 자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항목입니다.) 둘째로 자원봉사. 4년 동안 총 1,500시간 동안 자원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청소년을 돕고 싶은 마음에 학교에서 운영하던 청소년 부설기관에서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덕분에 상도 받았지요. 셋째로, 학회 활동. 당시 학과 안에 있었던 '사이코-소시오 드라마 학회, 마술가게'에서 활동했습니다. 한동안은 사이코-소시오 드라마 디렉터가 되고 싶을 정도로 열심히 활동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정말로 여러 곳에서 일했던 것 같습니다. 자원봉사 관리자를 교육하는 전문 시민단체에서 경력을 시작해서, 구립 자원봉사센터, 장애인을 위한 의료재활 재단, 병원 사회사업실, 장애인복지관까지 좋게 말하면 다양하게 경험을 쌓은 셈이고, 나쁘게 말하면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방황만 했던 거죠. 그러다가 모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됩니다. 뭔가 대단한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석사학위가 대단한 경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만, 돌파구를 찾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학원 시절에 다행히(!) 부부-가족치료/해결중심모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 인생이 바뀌게 된 계기가 되었죠.)
2014년, 제 삶에서 가장 충격적인 일이 생겼습니다. 10년 동안 만나고 결혼까지 했던 사람과 헤어졌습니다. 제가 원했던 이별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별이었기에 충격이 컸습니다. 결혼으로 만나는 배우자는 거울 같은 존재 같습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제가 어릴 때부터 적기에 처리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 쟁여 두었던 모든 심리적 문제가 전처라는 거울 앞에서 모두 튀어나왔던 것 같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구토한 끝에 내가 먹고 마신 모든 지저분한 음식물을 길바닥에서 처참하게 확인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물론, 끝내 죽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즈음부터 개인 상담을 받았습니다. 원래 이혼하기 전부터 상담을 받았는데, 전처와 헤어지고 나니 이혼이 주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이혼 과정에서 극적으로 드러난 제 모든 과거 상처와 불안이 주제가 되었습니다. 처음 2년 동안은 내내 부모님 욕을 했습니다(이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는 어린 시절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 2년 동안은 전처에 대한 온갖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분노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집밖에 나가지도 못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년은 저 자신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 불안감을 확인했습니다. 정말 길고도 어둡고 고통스러운 길을 걸었습니다.
2018년 여름, 박사과정을 수료한 직후에 존경하는 양원석 선생님에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아는 형님이셨는데요, 제가 원하는 바가 '책을 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도움을 청했던 겁니다. 그러다가 의도치 않게 SNS에 해결중심모델 관련 글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동한 공부/실천해 온 내용을 짧은 원고로 정리하면, 양원석 선생님께서 읽으시고 코멘트를 해 주시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 글을 통해서 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양원석 형님은 워낙 사회복지계에 유명한 분이셨기에 '함께 글을 연재하는 저 녀석은 도대체 누구야?' 라는 의문을 많은 분들이 떠올리셨을 겁니다.
2019년부터는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저로서는 제가 좋아하는 해결중심모델이나 상담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돈을 받았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이런 일이!) 이때만 해도 선생 일이 주된 일이 될 지는 몰랐습니다. 그냥 '신기하다?' 이 정도였죠. 그런데 일이 점점 커지고,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불려 다니고, '어~ 어~ 어~' 하는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되었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일을 이렇게나 좋아했나? 하고 싶었나?' 싶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제 영혼에 딱 맞는 일을 찾은 겁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성장'할 수 있는 일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니까요. '성장'이야말로 제가 추구하는 가치니까요.
2020년부터는 휴먼 임팩트 협동조합을 통해서 해결중심모델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오프라인 강의부터 시작해서 온라인 녹화형 강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현재까지 온라인 녹화형 강의를 통해서 500명이 넘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를 시작으로 여러 사협에서 사회복지사 보수교육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늘 말하지만, 저는 사회복지사협회 교육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여름부터는 해결중심모델 교육을 넘어서서, 좀 더 기본적인 상담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개별 기관에서 의뢰를 받아서 사례관리 등 상담과 관련된 자문도 시작했습니다. 2020년 한 해 동안 제가 하는 일이 거의 완전히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2021년부터는 장기적으로 운영하는 소그룹 해결중심상담 클래스를 열었습니다. 기본반과 고급반으로 나누어서 운영했는데요, 정말로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은 사회복지사 동료들을 만나서 해결중심모델을 포함하는 강점관점실천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저는 해결중심모델이야말로 제너럴리스트 사회복지사가 공부할 가치가 있는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델을 배우면, 구체적인 상담 스킬과 더불어 사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포괄적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너무 일회성 교육만 받아서 쌓이는 지식은 없고 눈만 높아지는 사회복지 업계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였다고 자평합니다.
2021년을 돌아보면서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중장기적으로 공부를 하고 자문을 받으신 분들께서 크게 성장하시는 모습을 본 일입니다. 특히, 포천시종합사회복지관 김민재 팀장님과 함께 준비하고 실행했던 '해결중심모델 사례지원 학습네트워크 포밀(포스트 밀워키)'와 송파구방이복지관(장애인복지관) 자문 스터디, 서울 중부지역 교육복지센터 연합 스터디, 당진북부사회복지관 자문 스터디, 그리고 의정부시남자청소년단기쉼터 선생님들과 함께 했던 자문 스터디가 기억에 남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하면서 해결중심모델을 공부하는 의미가 단순히 질문 몇 가지 배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2022년 한 해를 돌아보는 글을 쓰면서, 제가 어째서 대학시절부터 이어진 제 삶을 언급했을까요? 읽으셨다시피, 제 삶 전반기는 온통 방황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너무 이리저리 흔들렸기 때문에 저 자신이 보기에도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니 단 한 순간도 그냥 버려지는 경험은 없는 것 같습니다. 방황을 하고 있을 때는 자괴감에 시달릴 때도 있었고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때도 있었지만, 수많은 '아닌 것'을 쳐내고 나니 '진짜'가 남았으니까요. 혹시라도 예전 저처럼 엄청나게 헤매면서 혼란스러워하시는 동료 분들이 계신다면,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괜찮습니다. 언젠가, 봄이 오고 그대도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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