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봄이가 절을 다 하네?
(아버지 말씀) "어? 봄이가 절을 다 하네?"
언젠가 아버지를 2년 정도 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못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끔찍한 일을 당하고 나서 거의 완전히 칩거 생활을 했을 때, 여러 가지 복잡한 심정으로 가족을 멀리했습니다. 좌절감, 창피함, 분노, 원망 등, 마음 속 밑바닥에서부터 헛구역질처럼 매일 역하게 올라오는 감정을 온 몸으로 견디느라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가족마저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제가 혼자 살던 집 상황은, 마치 쓰레기장 같았습니다.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서 동원한 수사법이 아닙니다. 온갖 잡동사니가 굴러 다니고, 모든 옷가지가 발길에 채여서, 문득 정신이 들 때마다 처참해서 스스로 놀라곤 했습니다. 그 한 가운데 누워서 꼼짝 못하고 썩어가고 있던 제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싫었습니다. 너무나도 분명하게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으나, 그냥 입을 다물고 참고 견뎠습니다.
하루는 잠시 밖에 나가서 라면인가를 사왔습니다. 그런데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무심코 들어갔더니 아버지 모습이 보였습니다.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거실에 두 사람이 마주보며 섰습니다. 그 순간 제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이제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아버지 말씀이 끝난 후에 제가 불같이 화를 냈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린 서로 대판 싸웠습니다. 그리고 남인 것처럼 아버지를 좇아냈습니다.
사실, 마음 한편에서는 너무나 반갑고 고마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들을 잊지 않고 찾아와 주신 마음이 감사했습니다. 어쩌면 아들보다 마음이 더 많이 처참했을 텐데도, 평소처럼 뭔가 정리하고 치우고 계신 모습이 짠~하기도 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창피한 마음에서, 그리고 또 늘 그러셨듯이 저를 무시하시는 듯한 말투가 사무치게 싫어서, 제 마음을 한 쪽만 내비쳤습니다. 화나고 원망하는 마음만 보여 드렸습니다.
"오빠는 승리자! 오빠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잖아."
제 아내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맞습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바닥도 없이 끝없이 추락을 거듭하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데, 2년이 되지 않는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거의 3개월 만에 결혼을 하고, 46세 아내가 기적적으로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아이가 실제로 태어나고, 엄마 젖을 먹고, 기어 다니고, 옹알이를 시작하고, 이제 거의 걷기 직전까지 성장하다니. 왜 제 딸 이름이 봄인지 아시겠지요?
실제로 우리 딸은 저와 아내 삶에 봄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가을에 접어든 두 사람에게 파릇파릇 생명력 넘치는 봄이 다시 찾아온 셈입니다. 아이를 안아 주려면 허리부터 아프고, 손목에 무리가 와서 보호대를 차며, 매일 쏟아지는 기저귀며 빨래를 정리하느라 바쁘고,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닌 잔해물을 쓸고 닦느라 정신이 없지만, 봄은 봄입니다. 피곤할 겨를도 없이 행복합니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제 딸 봄이는 저와 제 아버지 관계에도 봄을 선물했습니다. 아버지와 영상 통화라니요... 그것도 거의 매일 영상 통화로 대화를 한다니요. 솔직히, 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보다 지금 이 상황이 더욱 믿기가 힘듭니다. 워낙 오랫동안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요. 거의 남남처럼 살았으니까요. 제게 일어난 모든 불행한 일에 대해서 아버지를 원망했으니까요. 마치 고아처럼 마음 먹고 살았으니까요.
이제 와서 제가 무슨 거창한 효도를 하겠습니까. 이제 와서 제가 무슨 대단한 호강을 시켜 드리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는,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제 삶에 찾아온 봄을 인정하고 안아주고 살아가면 그뿐이겠지요. 따스한 봄날처럼, 모든 죽었던 관계가 회복되고 향긋한 봄내음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웃으면 족하겠지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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