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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로, 귄터 아저씨! (나의 까미노)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이재원의 여행기 모음 2020. 6. 11.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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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7월, 나는 죽기 위해서 세상 끝으로 날아갔다. 까미노 순례길(vo.la/DptI)을 조용히 걸으면서 내 삶을 정리하고, 마침내 세상(유라시아 대륙의) 끝이 나오면, 바다에 빠져 죽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살아서 돌아왔고, 여전히 살아 있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까닭은, 까미노 위에 남아 있다. 

     

    28일 동안 850km를 걸었던, 뜨거운 그 여름의 기록을 다시 정리한다.  (2020년 6월 11일, 이재원 기록) 


    <나의 까미노>

     

    850km의 먼 길을 몇 줄의 글로 온전히 정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엄청난 경험이 기억 저편으로 그냥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기에 거칠게라도 적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보를 주는 여행기를 쓸 생각도 했지만 객관적, 주관적 정보는 이미 넘쳐나기에 마음을 접었다. 그냥, 완전히 내 위주로, 내 자신이 만족하는 개인적인 기억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2014년 8월 24일, 이재원 기록)

     

    1. 까미노는 사람이다.

     

    까미노에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증언하는 것은, 이 길이 어떤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이다. 위험할 것 같은데 위험하지 않고, 외로울 것 같은데 외롭지 않다. 길을 잃을 것도 같은데 늘 제대로 가고 있고,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았는데 늘 다시 만난다. 이게 다 길 위의 사람들, 사람들 때문이다.

     

    나도 처음에 혼자서 길을 나설 때는, 이것 저것 두려움이 많았다. 혼자서 그 먼 길을, 영어도 시원찮은데 잘 걸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걱정은 첫날부터 사라졌다. 투박한 길 위에, 좋은 사람들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순례자들끼리는 그저 눈인사만 해도 마음이 통하고, 말을 안해도 서로 필요를 헤아려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사실을 느끼게 된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이야기를 즐기게 되었고 이 과정 속에서 내 여정의 목적을 찾게 되었다. 바로, 사람들 속에서 나를 발견하기. 내가 평소 말이 좀 많지만, 무제한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에서 나를 내려 놓으니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뚜렷해졌다.

     

    길 위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을 기억해 본다.

     

    (1) 완벽한 아버지, 귄터 아저씨.

     

    독일인 선생님. 생장에서 묵었던 호스텔에서 만났다. 생장에 도착한 날, 호스텔 뒷뜰에 있던 작고 아름다운 정원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귄터 아저씨는, 독일의 직업학교에서 십대 청소년들에게 스포츠(축구)와 유럽 역사에 대해서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밤이 늦도록 독일 통일의 과정에 대해서 심도깊은(?) 토론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 짐을 챙기고 혼자서 길을 나섰는데, 마을 어귀 오르막의 시작점에서 귄터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짐을 정리하고 계시기에 약간 도와 드리고 함께 가자고 권했다. 적은 나이가 아닌 것 같은데도 걸음이 약간 빠른 나와 보조를 잘 맞추시는 게 좋아 보였다. 끝없이 펼쳐지는 피레네 산맥의 오르막길에서 온갖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서로 첫번째 까미노 친구가 되어 주었다.

     

    나로서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우선, 귄터 아저씨는 나와 영어 수준이 비슷했고 걷는 속도가 비슷했다. 좋은 까미노 친구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서로 맞았다. 그리고 귄터 아저씨는 친절하고 충직한 분이었다. 어눌한 영어로 느리게 하는 내 이야기를 언제나 참을성 있게 들어주고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이야기 해 주셨다. 게다가 귄터 아저씨는 역사 선생님! 유럽 역사와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 주셨다.

     

    귄터 아저씨는 딱 10일만 순례길을 걷는다고 했다. 850km 순례길을 삼등분 내지는 사등분 하여 매년 200km씩 걸을 계획이라고 한다. 역시 유렵 사람이라서 거리나 기간에 대한 부담이 없구나, 싶어서 아저씨가 너무 부러웠다. 처음에는 하루가 백년 같이 길게 느껴졌지만, 귄터 아저씨가 돌아가셔야 할 시간은 빠르게 돌아왔고, 나는 눈물을 머금고 아저씨를 보냈다.

     

    처음에는 그가 나를 좇는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내가 그를 좇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귄터 아저씨는 나에게 좋은 아버지 같은 모습을 보여 주셨던 것 같다. 과묵하지만 책임감 있고 친절하면서 지혜를 가진 아버지. "Lee, I don’t think so.” 자신의 생각과 다를 때는 언제나 꼬장꼬장하게 내가 틀렸다며 지적하셨던 귄터 아저씨. 이런 꼬장꼬장함과 가르침이 싫을 때도 있었지만, 귄터 아저씨가 가진 솔직함과 충직함이 나는 무척 좋았다.

     

    까미노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같이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룹을 형성하게 되지만, 겉모습의 친절 너머로 자신이 찾고 있는,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찾아서 서로 자석처럼 당기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선택한 또 다른 가족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신이 원했던 따스함을 몸소 체험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귄터 아저씨가 나에게 준 의미는? 현실 속의 내 아버지에게 내가 무엇을 바랐는지를 내가 분명히 깨달았다는 것.

     

    하지만, 까미노의 끝 산티아고에서 나는 깨달았다. 이제까지는 아버지에게 내가 바라는 아버지를 끝없이 요구했지만, 이제는 내가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어야 할 때라는 것을.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뜻하는 게 아니다. 부족하지만, 내가 가진 경험, 지식, 지혜가 필요한 인생의 후배들에게 내 것을 기꺼이 나누는 것. 이것이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되어가는 시작점이 아닐까? 


    "다 주거써, 나 말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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