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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 (나의 까미노)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이재원의 여행기 모음 2020. 6. 12.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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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7월, 나는 죽기 위해서 세상 끝으로 날아갔다. 까미노 순례길(vo.la/DptI)을 조용히 걸으면서 내 삶을 정리하고, 마침내 세상(유라시아 대륙의) 끝이 나오면, 바다에 빠져 죽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살아서 돌아왔고, 여전히 살아 있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까닭은, 까미노 위에 남아 있다. 

     

    28일 동안 850km를 걸었던, 뜨거운 그 여름의 기록을 다시 정리한다.  (2020년 6월 11일, 이재원 기록) 


    나의 까미노 

     

    2.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  (2014년 8월 27일, 이재원 기록) 

     

    <왼쪽이 아일랜드 여성 매리언, 나, 철호씨, 혜성씨, 사진찍는 이는 스웨덴에서 온 토비아스>

     

    (여름철 성수기에) 까미노를 걷기 시작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850km라는 긴 거리 때문에 내내 그냥 걷기만 하다가 올 거라고 기대했던 나 같은 초심자들은, 사실은, 까미노의 본질이, 단순히 걷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온 온갖 사람들과 만나서 나누는 사고와 정서의 교류를 통해서 새로운 자신을 만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바로 내가 까미노를 걷는 동안 계속 이런 사실을 절절하게 느꼈고, 그래서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게 되느냐가 좀 더 풍요로운 까미노 체험의 핵심이요 정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먼저, 그룹이 형성되는 과정. 정말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만 걷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그들만의 의도이므로 충분히 존중해야 한다. 산티아고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버스에서 만난 일본인 료마가 그랬다. "학부 과정을 마치고 대학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것이 많아서 왔어요. 까미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저는 그냥 조용히 제 길을 걸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하지만 저 혼자 조용히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전 그게 무척 좋았어요.” 일본인 특유의 수줍은 태도로 또박또박 진지하게 말하는 료마가 멋져 보였다.

     

    반면,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일정한 그룹이 형성되는 것이 어찌 보면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경험이다. 그룹이 형성되는 조건을 생각해 보면, 크게 세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영어. 까미노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스페인어이다. 영어는 순례자들 사이의 소통에 필요하고, 스페인어는 현지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필요한데(현지인들, 특히 나이가 많은 분들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분들이 많다. 스페인 까미노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독재자 프랑코가 외국 문물을 죄악시하면서 막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영어 실력에 따라서 순례자 그룹이 형성된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소통이 필요하고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언어인데, (그게 하필 영어라는 게 좀 싫기는 하지만) 만국 공통어인 영어를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서 친구를 만드는 과정이 쉬워지기도 하고 어려워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너무 두려워하지는 마시라. 영어가 필요하다는 거지, 아주 잘해야 한다는 건 아니니까. 왜? 사실, 까미노에서 나누는 이야기란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니다. 별천지에서 벌어지는 추상적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지금 여기에서 겪고 있는 작은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기 떄문이다. 즉, "너는 어디에서 왔니?”, "까미노는 어디에서 출발했니?”, “오늘 기분은 어떻니?”, “오늘은 어디까지 갈 거니?”, “좀 쉴래?” 등등 외국인들과 나누는 이야기란 뻔한 것이다. 따라서 간단한 자기 소개와 이런 화제를 중심으로 한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다면 충분하다.

     

    발음? 걱정 마시라. 나 같은 토종발음도 살아남았으니까. 사실, 사람들이 내 영어 발음 때문에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때가 많긴 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다. 조금 창피하긴 했지만, 사람들과 만나고 친구가 되고 소통하는 과정이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어서 자존심 따위는 길가에 헌신 버리듯 내팽겨쳐 버리곤 했다. 그리고는 수많은 관계와 친구를 얻었다. 발음 좀 나쁘면 어떤가? 미소로 커버하면 되고, 진심어린 눈빛과 친절, 그리고 배려로 커버하면 된다.

     

    물론, 영어를 잘하면 좋다. 잘하면 잘할수록 좋다. 특히, 네이티브 영어권에서 온 사람들과 최소한 일상적인 대화만이라도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정도라면 정말 환상적일 거다. 내 경험에 따르면 까미노에 네이티브 영어권에서 온 사람들은 적었다. 미국 사람 약간, 그리고 드물게 영국사람과 아일랜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영어를 무척 잘한다. 너무 영어를 잘해서, 내가 물어본 적도 있다. "너네가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비결이 뭐니?” 그랬더니 스웨덴 친구 왈, "응, 우리나라에서는 티비나 극장에서 모두 더빙을 안하고 자막을 쓰거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영어 발음이나 이런 게 익숙해. 내 생각엔 그게 중요한 이유 같아.”

     

    까미노에서 그룹이 형성되는 두번째 조건은, 역시 ‘걷는 속도’이다. 아무리 마음이 맞고 소통이 잘되어도 걷는 속도가 다르면 헤어질 수 밖에 없다. 가족이 함께 오더라도 그렇다. 왜냐하면 까미노는 함께 왔어도 결국은 혼자 걷게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까미노에서는 예외 없이 각자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길을 걷는다.

     

    그룹이 형성되는 마지막 조건은, 지역과 국적이다. 까미노가 유럽에 있는 길이다 보니 역시 스페인 사람들을 포함한 유럽인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데 크게 보아 북쪽 사람들과 남쪽 사람들로 성향이 나뉜다.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사람들은 좀 시끌시끌하고 정이 많은 편이다. 특히,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왠지 한국 사람 같기도 하다. 반면에 독일 사람들이나 스칸디나비아 지방 사람들은 뭐랄까 좀 개인주의적이고 조용한 편이다. 까미노를 걸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성향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스페인 사람들은 일단 친해진 사람들을 가족처럼 챙기는 성향이 있다. 다음날 어디 갈 것인지 물어봐 주고 함께 걷는 것을 즐긴다. 반면, 북유럽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약간 ‘쌩~’한 부분이 있다. 주로 그냥 혼자서 가 버리고, 하지만 만나면 또 반갑게 인사하고. 한국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약간 겉으로만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을만 하다. 그래서 아침에 기다려주었다가 함께 출발하는 것은 사람들의 성향을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바로미터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성향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사람마다 성향은 다르다.

     

    내 경험을 말하자면, 까미노 일정을 약 30일로 생각했을 때 10일씩 각각 다른 그룹에 속했던 것 같다. 첫번째 10일은 생장에서 만나서 함께 출발한 독일인 귄터 아저씨와 함께 걸었다. 귄터 아저씨는 영어 구사력이나 발음의 정확도가 나와 수준이 비슷했고, 걷는 속도가 비슷했다. 그리고 속정이 있어서 나를 늘 기다려 주었다. 특히 그는 유럽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 선생님이어서 좋았다.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10일은 아일랜드 젊은 여성인 매리언과 스웨덴 청년 토비아스, 그리고 한국인 대학생 리와 김, 이렇게 네 명과 함께 걸었다. 매리언과 토비아스는 북쪽 사람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지만 꽤 친절한 편이었고 영어를 무척 잘했다. 하지만 북쪽 사람들 특유의 '쌩~’함은 우리 한국인들과 잘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결국 그룹은 약 10일만에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내가 마지막 10일 동안 속했던 그룹은 마크과 루씨였다. 마크는 캐나다 퀘벡 청년으로서 무척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고 루씨는 스페인 출신으로 스위스에서 살고 있는 노년의 아줌마로서 역시 무척 밝고 명랑한 분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굉장히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길 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 친구를 맺었지만, 이 두 사람이야말로 나에게 까미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 준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과 함께 다니면서 나는 정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조건 외에 몇 가지 조건이 더 있는 것 같다. 네번째는, 나이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친절하고 현명하고 따뜻하다. 걷는 속도만 비슷하다면(즉 체력만 좋다면) 젊은 사람들보다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순례자 동료로 훨씬 더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섯번째는, 직업이다. 여름에는 세상의 모든 학교가 방학을 해서 그런지, 외국인들 중에서도 특히 교사가 많다. 내 생각에 교사는 함께 다니기에 가장 좋은 직업군이다. 늘 가르치려고 하는 직업적인 특성만 이해하면, 지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점과 이해심이 많다는 점이 좋다. 여섯번째는, 영화이다. 엥? 웬 영화?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영화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각국의 영화를 알고 있으면 해당 국적의 외국인들과 좀 더 쉽게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고 이는 소통과 관계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프랑스인을 만나면 프랑스 영화 이야기(소피 마르소 이야기 등등)로, 이탈리아 사람을 만나면 이탈리아 영화 이야기(로베르토 베니니 이야기 등등)로 대화를 풀어나가곤 했고 늘 성공(!)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이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모든 수단적인 것을 뛰어 넘어 신비한 화학작용이 작용한다는 본질적인 부분을 말하고 싶다. 영어를 못해도 소통할 수 있다. 나이가 달라도 소통할 수 있다. 소통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까미노에서 열심히 걷던 어느날, 나는 어느 프랑스 부부를 만났다. 고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남편과 30년간 지갑 봉제 일을 하다가 최근에 유명한 패션 업체에서 옷을 꿰메는 일을 하는 부인이었다. 그 전날 밤, 어떤 젊은이들이 알베르게에서 자신들의 가방을 털려고 시도하는 바람에 놀라서 밤잠을 설첬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이분들은 영어를 거의 한 마디도 못했다. 그래서 엄청나게 답답했다. 하지만 나는 이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손짓과 발짓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활용해서 2시간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오! 외국인 친구들과 매일 24시간을 동고동락하면서 수백km를 걸은 끝에 산티아고에 다다르는 경험은, 엄청난 대성당의 규모와는 전혀 상관없이 모든 순례자에게 엄청난 감동을 준다. 오늘도 까미노에 서 있을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두 이 엄청난 감동을 경험할 수 있기를 빈다. Buen Camino!


    "다 주거써, 나 말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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