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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구들이 너무 잘 있어서
    지식 공유하기(기타)/돌아오라 1988(공감 텍스트) 2022. 1. 18.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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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1>

     

    미란: 가스 확인 잘 하고~ 응? 그리고 화장실 물은 끝까지 내려, 안 그러면 막히니까. 그리고 나물은 오늘 안에 꼭 먹어야 해. 그리고 너 정환아, 밥할 때 알지? 손등, 손등. 

    성균: 알았다, 알았다. 얼른 가라, 장모님 기다리시겠다. 

    정봉, 정환: (인사하며) 다녀 오세요. 

    미란: 어휴... 발이 안 떨어진다, 발이 안 떨어져. 

     

    간만에 친정에 방문하는 미란. 사랑하는 부모 형제 만날 생각을 하니 설레지만, 집에 남겨둘 세 부자 때문에 발길이 잘 안 떨어진다. 왜? 남자들 셋이서 집에 있어봤자 물건 어지르고, 온갖 지저분한 행동을 하면서 퍼져 있을 테니까. 그래서 미란은 대문을 나설 때까지 끝없이 잔소리를 한다. 가스 확인 잘 해라, 화장실 변기 막히니까 물 잘 내려라, 냉장고에 있는 음식은 언제 어떻게 먹어라, 밥할 때는 손등까지 물을 잘 맞춰라... 하지만 남자들 표정은 '독립 만세'를 부르기 직전. 말은 '알았다'고 하지만, 실은 아무 것도 모르겠고, 엄마가 동네를 떠났을 때... 

     

    우습지만 옷부터 벗는다. 빤스랑 난닝구만 입은 채로, 텔레비전 앞에 가서 눕는다. 이제부턴 텔레비전 채널을 발가락으로 돌릴 태세. 밥은 대충 라면 정도로 때우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은 안 먹어서 버리게 될 테고, '어? 집에 이런 물건이 있었나?' 생각할 정도로 오만가지 잡동사니를 다 어지르게 될 터. 정봉이는 마요네즈 + 마아가린 + 설탕을 듬뿍 친 완전 느끼 비빔밥을 제조해 먹고, 성균과 정환은 과자를 바닥에 흘리면서 넋을 놓고 TV를 본다. 난장판이 따로 없다. 

     

     

    <장면 2>

    정봉: (전화기가 따르릉, 울리자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표정이 바뀐다)

    성균: 누고? 

    정환: 누구야, 형? 

    정봉: 엄마. 지금 터미널에 내리셨다는데? 

    성균, 정환: (표정이 얼어붙는다)

    성균, 정봉, 정환: (세 사람, 갑자기 뛰어 다니며 온 집안을 치운다) 

     

    하지만 역시나 우리들만의 행복한 시간은 끝나고... 드디어 왕이 귀환한다. 정환이가 무심코 집어든 전화기 수화기 너머로 포스가 느껴진다. 미란이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렸다는 소식. 성균, 정봉, 정환은 빠르게 상황판단을 끝내고, 집안을 치우기 시작한다. 집안 거실이 모두 보이는 풀샷으로 보니, 집안은 그야말로 쓰레기장. 평소에 쓰지 않던 배드민턴 채까지 나와 있을 정도. 

     

     

    미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집안을 두루 살핀다. 거실을 보고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미란: (냉장고 문을 열고 이리 저리 살핀다.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집에 도착한 왕께서 길가에 도열한 백성들을 지나쳐서 모든 일을 점검하기 시작하신다. 그런데 미란의 표정이 이상하다. 집안에 들어왔을 때 이상하게 자신만만하던 표정이 놀라움을 거쳐서 당혹스러움과 뭔지 모를 상실감으로 번진다.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기에 가장 취약할 수 있는 냉장고까지 열어 봤건만, 너무나도 정리가 잘 되어 있다. 먹으라고 신신당부한 나물도 모두 다 먹었다. 성균의 표정은 거의 의기양양하다. 

     

     

    <장면 3> 

    정환: 왜 기분이 안 좋지? 

    동룡: 집이 개판인가보지 뭐. 

    정환: 웬열. 싹 다 치웠거든. 청소, 설겆이 완벽해. 연탄불도 다 갈고, 엄마가 먹으라는 거, 반찬도 다 먹고. 엄마도 놀랐을걸? 우리 엄마 손가락 하나 까닥 안해도 돼. 

    동룡: 음... 식구들이 너무 잘 해서. 

    정환: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동룡: 엄마가 없는데도, 식구들이 너무 잘 있어서. 

     

    그런데 엄마가 기분이 안 좋다, 고 정환이가 보고한다. 택이방에서 건강 다이제스트를 눈으로 빨고 있던 동룡은 무심하게 강력한 가설('집이 개판인가보지')를 제시하지만, 정환이는 부인한다. 엄마가 겉으로 말했던 그 모든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심지어 엄마가 돌아왔을 때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해도 될 정도로 모든 걸 완비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기분이 나쁜거냐? 그때 동룡이가 핵심을 찌른다: '식구들이 너무 잘 해서. 엄마가 없는데도, 식구들이 너무 잘 있어서.' 뭔가 이해가 안될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되는 말. 말로 표현하지 못할 엄마의 양가적인 감정이 동룡이 말에 담겨 있다. 핵심을 찌르는 동룡의 말을 듣고 뭔가 각성한 정환. 

     

     

    <장면 4>

    정봉: (가스레인지 앞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다) 

    정환: (갑자기 정봉에게 다가와 정봉의 손을 냄비 뚜껑에 댄다) 

    정봉: (뜨거워서 놀라고 고통스러워하며) 꺄오~ 

    정환: (안방을 바라보며) 엄마~ 형, 손 데였어. 

    미란: (안방에서 구급약통을 들고 나오며) 으이그... 내가 못살아, 진짜. 응? 나이가 몇인데, 라면 하나를 제대로 못 끓여? 

     

    바로 행동에 나선다. 정봉이형은 평소에도 가지고 있던 빈틈을 더 많이 보여야 한다. 예컨대, 엄마 없으면 라면 하나도 제대로 못 끓여야 한다.

     

     

    <장면 5>

    성균: (보일러실에서 연탄을 갈고 있다) 

    정환: (갑자기 성균에게 다가가 연탄을 땅에 떨어뜨린다) 

    정봉: (정환이가 하는 이상한 행동을 보면서 놀란다) 

    정환: (뒤를 바라보며) 엄마~ 아빠, 또 연탄 날려 먹었어~ 

    미란: (번개탄을 들고 들어오며) 으이그... 잘한다 잘 해. 응? 뭐 똑바로 하는 게 없어! 못살아 진짜. 

     

    아빠도 마찬가지. 엄마가 없으면 연탄불 하나도 제대로 갈지 못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장면6> 

    정환: (방안에서 옷장을 마구 뒤진 후에 뒤를 돌아보고 외친다) 엄마~ 내 반바지 못봤어요? 

    미란: 으이그, 으이그, 으이그... 여기 있잖아, 여기. 이걸 하나 못찾아?

    정환: 제 눈엔 안 보였는데...

    미란: 으이그... 어휴~ 웬수들, 다들 나 없으면 어떻게 살라고 그래? 응? 뭐 하나 똑바로 하는 게 없어. 

     

    마지막으로 정환이도. 엄마가 없으면, 반바지 하나도 제대로 못 찾아야 한다. 머리 좋은 수재, 정환이도 엄마 앞에서는 그래야 한다. 

     

    <장면 7> 

    성균, 미란, 정봉, 정환: (잔을 부딪히며) 건배~

    성균: 오랫만입니더. 

    미란: 오랫만은, 이틀밖에 안됐는데. 

    성균: 캬~ 좋다! 여보, 이번에 당신 없으니까, 진짜 뼈저리게 느낀 게 있다. 

    미란: 뭐? 

    성균: 우리 남자들은 당신 없으면 다 쓰레기다 쓰레기. 쓰레기 된다. 

    미란: (크게 웃는다)

     

    그제서야 미란이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동룡이가 맞았다. 동룡이는 관계에 대한 천재였다. 성균이는 '우리는 모두 쓰레기다'라고 말하면서도 건배를 하고, 맥주와 함께 목 뒤로 넘어가는 기쁨을 느낀다. 정봉과 정환이도 엄마 옆에서 즐겁게 쥬스를 마신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야기 하나. 이 장면을 보면서 뜨끔하지 않은 남자는 별로 없을 듯. 나 역시, 어릴 적 엄마가 없으면 집안을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묘한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엄마가 없어서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집안을 어지르면서도 언젠가는 끝이 있고, 끝이 오면 이 모든 걸 전부 다 제자리로 돌려야 한다는 막연한 부담감...이 느껴져서 마음대로 즐기지도 못하는? 하하. 

     

    이야기 둘. 가족치료를 전공한 사회사업가로서 나는 이 장면을 대단히 흥미롭게 지켜봤다. 우선, 미란이가 느끼는 양가감정을 생각해 보자. 가족은 체계다. 체계에는 구조가 있다. 인간은 생물이므로 가족 안에 형성되는 구조는 결국 관계다. 그리고 인간관계란 소통이 반복되면서 형성된다. 대화가 반복되고 패턴화되면 상호적인 관계가 만들어지고, 관계 패턴이 안정화되면 가족 규칙이 된다. 예컨대, 잔소리도 일종의 관계 패턴이고 가족 규칙이다. 가족 성원은 이렇게 안정된 구조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체계가 가진 항상성은 이 구조에서 온다. 미란이 남편을 포함한 쓰레기 남자들과 맺고 있는 관계는? 미란은 집안 곳곳을 누비면서 생활 습관을 주장하고 관철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제다이 기사처럼, 집안에서 포스의 균형을 잡고 있는 존재다.

     

    그런데 친정을 방문하는 사건을 통해서 안정적인 역할 구조에 균열이 일어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성균, 정봉, 정환 이 세 사람은 이번만큼은 엄마/아내가 돌아왔을 때 깔끔하게 보이고자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다. 어디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때, 왜 이렇게 집안을 어질렀냐고, 나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고, 말하는 미란의 잔소리를 한쪽 면으로만 해석한 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친정을 방문하고 돌아온 미란이 정말로 깨끗하게 치워진 집안을 돌아보면서 느낀 묘한 실망감은 무엇인가? 아마 미란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고 예상하지 못했을 이 묘한 실망감은 무엇인가? 

     

    '식구들이 너무 잘 해서. 엄마가 없는데도, 식구들이 너무 잘 있어서.'

     

    내 생각에 동룡이는 가족치료를 해야 한다. 정환이네 가족 안에 존재하는 관계 패턴과 항상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미란이 가족 안에서 수행하고 있는 역할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꿰고 있다. 본질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미란이 문제라고 말했던 이 집안 남자들의 게으름과 모자람은 실은 미란이 이들과 상호의존하면서 만들어 낸 가족 구조였다. 모두 막연하게 느끼고 있지만 말해 본 적은 없는(즉 인식해 본 적은 없는) 가족구조가 예외적인 상황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 셈. 우리가 이 흥미로운 장면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은, 가족 체계 안에서 한 구성원이 느끼는 감정은 홀로 독립된 감정이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 안에서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나는 관계적인 감정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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