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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성보라냐구?!
    지식 공유하기(기타)/돌아오라 1988(공감 텍스트) 2022. 1. 20.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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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2년째 고백을 못했어. 

    덕선: 고백해. 

    선우: 어? 

    덕선: 고백, 하라고. 어~ 첫눈 오는 날. 

    선우: (놀라움과 깨달음이 조심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표정을 짓는다)

    덕선: (기대감과 애정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첫눈 오는 날, 고백해. 어? 

     

    오늘도 택이 방에 모여 있는 쌍문동 아이들(정환, 선우, 동룡, 덕선). 택이가 이기기 힘든 해외 바둑 기사 5명을 모조리 이기고 대회에 우승하고 귀향하는 날. 난적을 모두 이기면 피자를 사 주겠다고 약속한 말을 친구들은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피자 파티. 모든 조각을 순식간에 먹어 치운 뒤 남은 한 조각을 두고 쌍문동 아이들이 불쌍함 배틀을 한다.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먹을 자격을,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경쟁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부여하는 장난스런 게임.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오다가 선우 차례가 왔는데... 선우는 갑자기 진지한 이야기를 한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2년째 고백을 못했어." 그러자 덕선이 눈빛이 갑자기 반짝이기 시작한다. 최근에 덕선이는 선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심각한 착각에 빠져 있었던 바, 선우가 당사자인 자기 앞에서 은근슬쩍, 아니 완전히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신호를 발견한 셈. 때는 이때다, 들이대는 덕선. 첫눈 오는 날, (자신에게) 고백을 하라고 선우를 밀어댄다. 

     

     

    선우: 덕선아~ 성덕선~ 

    덕선: (혀짧은 소리로) 선우야, 왔어? 들어와. 

    선우: 어, 괜찮아. 

    덕선: (알면서 모른 척한다) 무슨 일이야? 어? 

    선우: (담담하고 순수한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보라... 누나 있어? 

    덕선: (해맑은 표정으로) 누구? 성보라? 

    선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덕선: 성보라 없는데? 언니는 왜? 

    선우: (의아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키며) 눈, 오잖아. 

    덕선: 응?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자기가 했던 말이 생각나면서 서서히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바뀐다.)

     

    으아~ 드디어, 첫눈이 내린다! 덕선이는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선우가 첫눈 오는 날, 고백을 할 예정이기 때문. 자꾸 창밖을 확인하면서 언제 선우가 오나, 기다리던 순간... 커피에 프리마를 타고 있는데 선우가 덕선이네 집앞에 와서 덕선이 이름을 부른다: "덕선아~ 성덕선~" 덕선이는 거울 앞에서 머리 모양만 잠깐 만진 후에, 선우에게 문을 열어준다. 선우는 친구 덕선의 말을 수용하긴 했다. 그래서 왔다. 하지만 고백 대상은 덕선이가 아니라 덕선의 언니 보라. 선우는 덕선이의 펌프질에 용기를 얻었나보다. 덕선이가 첫눈 오는 날 고백하라고 등을 떠밀었을 때, 선우는 자기가 보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덕선이도 알아챘다고 느꼈을 수 있고, 덕선이가 뭔가 선우에 대한 보라 태도에 대해서 긍정적인 힌트를 주는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선우는 용기를 내서 진지한 마음으로 첫눈 오는 날 보라를 만나러 왔다.

     

    한편, 덕선이는 완전히 반대 상황. 선우 마음이 쏜 화살이 자신에게 올 거라고 철석(鐵石: 강철과 돌)같이 믿고 있었다. 덕선 처지에서는 완전히 작전이 성공한 상황. 특히, 최근에는 선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신호를 많이, 아주 많이 보낸다고 해석하고 있었다(착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택이네 집에서 열린 피자 파티에서 '첫눈 오는 날 고백하라'고 자기가 보낸 명백한 신호를 선우가 완전히 수신했기에 오늘 이렇게 찾아왔다고 확신한다. 이제 드디어 화룡점정, 다 그린 용그림에 눈만 찍으면 되는 순간. 잔뜩 기대하는, 그러나 너무나도 순수한 모습으로 덕선이는 이 순간을 즐기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선우는 '보라 누나'를 만나러 왔단다. 엥? 성보라? 늘 쌀쌀맞고 퉁명스러우며 아무 때나 동생을 밥 먹듯 패는 못된 우리 언니? 이 중요한 순간에 선우는 왜 우리 언니, 성보라를 찾는 거지? 이 순간까지 덕선은 선우가 자신에게 고백하러 왔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세상 해맑은 표정으로(그러므로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선우 입으로 진실을 듣는다: 이건 뭐지? 하는 표정으로 잠시 서 있던 선우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그리고 말한다: "눈, 오잖아." 그러니까, "네가 고백 하라면서? 첫눈 오는 날? 너도 알다시피, 나는 보라 누나를 좋아하고, 정말로 오랫동안 주저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네가 격려를 해 주고 용기를 전해 줘서 이렇게 왔잖아" 라는 뜻.   

     

     

    덕선: (울먹이며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야! 너, 거기 서 봐. 왜? 왜 성보라야, 엉? 왜 성보라냐구? 

    선우: (의아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약간 주저하면서) 누나, 좋아하니까. 

    덕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어디가? 어디가 좋아? 

    선우: (눈알을 굴리며 생각하다가) 예쁘고. 

    덕선: 지랄. 

    선우: 똑똑하고. 

    덕선: 웬열! 

    선우: 착하고. 

    덕선: 미친놈! 

    선우: 그리고 눈 옆에 있는 점도 예뻐. 

    덕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다가 마침내 울부짖는다) 그거 내가 찍어준 거야! 내가 아홉살 때 내가 샤프로 콱 찍은 거라고! 아~ 진짜, 왜 성보라야! 왜 성보라냐고! 아~씨~ (집으로 돌아 들어가려다가 다시 돌아와서 선우 머리를 때린다)

    선우: 아~ 야?

    덕선: (분노, 원망, 짜증, 속상함, 쪽팔림, 이건 뭐지, 흥분이 뒤섞인 표정으로) 너, 두 번 다신 안 봐! 

    선우: (놀람, 당황스러움, 억울함, 이건 뭐지, 살짝 미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한다.) 

     

    너무나도 80년대스러운 부엌(입구에 붙은 시뻘건 부적, 바닥에 앉아 있는 석유 곤로, 바닥에 붙인 지극히 평범한 타일, 짤순이와 세제, 허름한 나무 찬장, 벽에 걸어 놓은 파리채까지, 정말로 완벽한 모습)에 우두커니 서서, 그동안 선우가 보라를 남몰래 좋아했던 모든 증거 자료를 파노라마처럼 머릿 속에서 확인하는 덕선. 그러고 보니 모든 장면이 다 선우가 보라를 좋아한 증거다. 너무나 명백하다. 심지어 보라가 직접적으로 퉁명스럽게 말했을 때도 수줍게 웃던 선우.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억. 울. 하. 다. 이. 건. 아. 닌. 것. 같. 다. 덕선은 얼른 선우를 따라 나선다. 속절없이 내리며 온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는 우아한 눈 축제 속에서, 그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기분으로, 덕선이는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선우에게 토해 내며 울부짖는다: "왜, 왜, 왜 성보라야?!" 사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질문.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콩깍지, 라는 말이 왜 생겼겠나. 사실 먼저 좋아하고 이유를 찾는 거지, 좋아할 이유를 찾은 후에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덕선은 확인할 필요도 없고 해서는 안될(결국 자기 속만 상하니까) 질문을 이어간다. 

     

    어쩔 수 없이, 선우는 냉정하게 그의 현실을 말한다. 보라 누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예쁘고(예뻐 보이는 거겠지?), 똑똑하고(이건 사실이지만 덕선에게는 더욱 짜증날 말), 착하고(동생에게 얼마나 쌀쌀맞은지 뻔히 안다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없을 텐데... 하지만 선우는 보라가 말로만, 겉으로만 쌀쌀맞지, 실은 마음이 따뜻하고 착하다는 사실을 안다)... 심지어 덕선이가 아홉살 때 보라랑 싸우다가 샤프로 찍어 준 눈 옆에 있는 작은 점마저도 선우는 좋단다. 

     

    이번이 덕선의 첫사랑이 아니었다면, 덕선이가 누군가 좋아하는 마음을 거절당해 본 경험이 있다면, 혹은 누군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했을 때 거절해 본 경험이 있다면, 그러니까 덕선이가 조금이라도 더 인생 경험이 있었더라면, 선우로 하여금 정말로 뼈아픈 현실을 이야기하도록 시키진 않았을 거다. 선우는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를 할 테니까. 덕선의 마음을 더욱 본격적으로 뒤집어 놓는 말을 디테일하게 할 테니까.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지 너무나도 뻔하니까.


    내가 이런 드라마 장면에 나오는 여러 가지 감정을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따져보면서 분석하는 이유. 사회복지사를 포함하는 원조전문가는 특정 상담 모델을 배우기보다는 이런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깊이 느껴보고 이해하는 경험을 먼저, 더 많이 해야 한다. 테크니컬한 대화법을 익히기 전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먼저다. 상담 기술을 배우지 말라는 게 아니다. 상담 기술은 필요하고 좀 더 나은 원조전문가가 되려면 반드시 배워 나가야만 한다. 현장 실천은 어떤 가치나 모델을 견고하게 기본으로 삼고 앞뒤가 맞게, 일관성 있게 해 나가는 실천가로 채워져야 한다. 그대가 바로 그런 고급진 원조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다. 뭔가 대단한 상담 기술을 적용하기에 앞서서, 뭔가 여러 가지 지원체계나 제도를 소개하기에 앞서서, 내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느끼고 있을 세세한 감정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내 소박한 꿈 중에 하나는, 이렇게 재미난, 그러나 따져 보면 깊이가 있는 드라마 장면을 가지고 사회복지사를 포함하는 원조전문가들과 재미있게 이야기 나누는 수업을 운영하는 꿈이다. 생생한 드라마 장면을 함께 보고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상담 원리, 개념, 기술을 배워 나가는 꿈이다. 어찌 보면 작은 꿈. 하지만 멀리, 정말 멀리 보면 원대한 꿈.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조각을 만들어서 맞춰 나가는 부지런한 나만이 꿀 수 있는 꿈. 

     

    매일 새벽 네시 반에 깨어나서 글을 쓰는 나만이 꿀 수 있는 원대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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