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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 (D+695)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4. 1. 5.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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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장면. 

     

    "(밝게 웃으며) 아이고, 얘는요~ 동요도 취향이 있더라고요. 다른 아이들은 제가 동료 불러 주면 아무 거나 다 좋아하는데, 얘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아니야!'라고 외쳐요."

     

    보통 5시에 어린이집에 봄이를 데리러 간다. 아이 손을 잡고 어린이집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데, 오후 통합반 돌봄 선생님께서 흐뭇하게 웃으시면서 저렇게 말씀하신다. 문득, 내가 선생님이면 어떨까 싶다. 당연히! 선생님으로선 잘 따라오는 아이가 좀 더 편하고 예뻐 보이리라. 아이가 어딘가 까탈스럽다면, 아무래도 대하기가 어려울 테고. 하지만 전혀 나쁘게 듣진 않았다. 오히려 무척 좋게 들렸다. 선생님께서 봄이 취향을 세세하게 챙겨서 맞춰 주신다는 뜻이니까. 그만큼 품 넓게 우리 딸을 돌봐 주신다는 뜻이니까. (감사합니다.) 

     

    두 번째 장면. 

     

    "봄이, 아기 인형 업고 그림책 보는 모습이 진지해요. 친구들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앉아서 집중을 보일 때가 있답니다."

     

    며칠 전, 어린이집 온라인 알림장에 씨앗반(1세반) 선생님께서 이렇게 적으셨다. 문맥상, 전혀 나쁜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들 무리에서 벗어난다'는 말이 마음에 살짝 걸렸다. 엄마 아빠는 봄이가 사교적이어서 친구들과 언제나 잘 지내길 바라니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만 2세도 채 안 된 어린 아이가 따로 앉아서 그림책을 집중해서 진지하게 읽는다니, 놀랍고 대단하다. 솔직히, 누가 나에게 사교성과 집중력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요구한다면, 집중력을 선택할 듯하다. 그만큼 집중력은 대단히 중요한 지적 능력이다. 

     

    최근에 봄이와 관련해서 겪은 일 두 가지를 놓고 곰곰 생각해 본다. 아직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우리 딸 봄이는 나와 아내를 딱 반씩 닮았다.

     

    먼저 아내를 닮은 점: (1) 밝고 명랑하고 흥이 있다. 아내는 성격이 무척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다. 무조건 상황을 좋게만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다. 아내는 언제나 잘 웃고,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누리고 있는 현실에 감사한다. (2) 정서 상태가 안정적이다. 아내는 늘 평정심을 유지한다. 정서 기복이 거의 없다. 나는 아내가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가끔씩 내가 잘못해서 짜증이나 화를 낼 때도 있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나를 닮은 점: (1) 집중력이 뛰어나다. 내 정체성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집중력'이다. 나는 무엇인가에 집중하면, 다른 사람/사물은 시야에서 아예 지워버린다. 온 세상에 그 대상만 존재하는 듯, 몰두하고 집중한다. 주변 사람들이 내 집중력을 보고 놀라곤 한다. (2) 낯을 가리고 예민하다. 나는 상당히 내성적인 개인주의자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집단 활동을 아주 즐기진 않는다. 언제나 혼자만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고, 취향이 약간 까탈스럽다. 호오가 분명하달까. 

     

    "너도 꼭 너 같은 아이 낳아서 키워 봐라." 

     

    매우 가부장적이셨던 아버지께서 언젠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소년기 이래로 내가 거의 매번 당신 시키는 대로 안 해 버리니까, 마침내 화를 내시며 다소 귀엽게 저주(?)하셨다. 그때 내가 뭐라고 답했을까. 말로는 답하지 않았고 마음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네, 저는 최소한 아버지처럼은 안 키울 겁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보낸 메시지는 짧고 간단했다: '네 방식은 틀렸어.'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진 않으셨다(아버지는 무척 과묵하시다). 하지만 나를 대하시는 태도가 늘 그랬다. 그래서 나는 늘 '소심하게' 아버지 기대를 저버리곤 했다. 듣고도 못 들은 척 하거나, 깜빡 잊어버린 척했다. 그러면서 내 세계를 지키려고 애썼다. 

     

    그래... 이제 보니, 봄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자기 정체성을 표현한다. 

     

    첫 번째 방법: '아니야'를 외친다. 봄이는 비교적 뚜렷하게 본인이 (아빠 엄마가 제시하는) 무엇인가를 싫어한다고 표현한다. 이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적어도 아빠보단 훨씬 더 외향적인) 엄마 성격을 닮은 구석이랄까. 아내는 기본적으로 친절해서 늘 주변 사람을 먼저 배려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 싫으면 싫다고 본인 기호를 명확하게 표현한다. 

     

    두 번째 방법: '듣고도 모른 척'한다. 대단히 자주, 봄이는 엄마 아빠 말을 듣고도 모른 척한다. 때로는 눈을 좌우로 굴리며 눈치를 보고, 때로는 (분명히 들었을 텐데) 모른 척한다. 이 행동은 봄이 또래 아이들이 보편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행동일 수도 있겠고, 그래서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내가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보였던 '소극적 반항 행동'과 미묘하게 비슷하다.  

     

    나는 평생을 두고 아버지가 세운 수직적 가부장 질서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그런데 종종 내 손짓에서, 발짓에서 아버지가 튀어나온다. '당신, 이런 면은 아버님을 똑닮았어요.' 솔직히, 죽어도 인정하기 싫지만, 아내 말이 맞다. 사실이다. 싸우면서 닮는다는 말이 맞다. 그래서 나는 끝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려고 노력한다. 최소한, 딸 정체성을 보호해주고 싶다. 

     

    아버지 앞에서 마음 속으로 '네, 저는 최소한 아버지처럼은 안 키울 겁니다'라고 반항하며 되뇌였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련다. 나도 모르게 무시로 튀어나오는 온갖 아버지스러운 말과 행동을 모두 다 주어 담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고집불통 아버지로 딸에게 남긴 싫다. 그래. 최고는 못 되어도, 최악은 피해야지. 깡통을 차는 아빠는 되지 말아야지. 

     

    이렇게, 봄이를 두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마음에 떠올린 잠정 결론: 아, 역시~ 유전은 무섭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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