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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 (D+777)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4. 3. 19.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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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 (D+777)

     

    (어린이집에서)

     

    이혜진 선생님: "아버님, 며칠 안 봤다고 봄이가 내외하더라고요." 

    나: "아, 봄이가 저를 닮았나 봐요. 낯을 조금 가려요."

    이혜진 선생님: "아, 그렇군요. 그래도 봄이가 좋아하는 노래 불러주면 또 다가와서 안기더라구요."

    나: "맞아요,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또 괜찮아지더라고요."

     

    (할아버지 집에서) 

     

    봄이 고모: "봄아~ 안녕? 잘 지냈니?"

    봄이: (아빠 바지를 붙잡고 말 없이 고개를 돌린다) "...." 

    봄이 고모: "봄이 고모가 낯설어서 그렇구나?"

    봄이 엄마: "호호호...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져요."

     

    (미용실에서) 

     

    민 부원장님: "어머, 얘~ 너 너무 예쁘다. 만화 캐릭터 같이 생겼네?"

    봄이: (엄마 바지를 붙잡고 말 없이 고개를 돌린다) "..."

    봄이 엄마: "호호호... 얘가 낯을 좀 가려서요."

    민 부원장님: "아, 네~ 정말 귀엽네요. 봄아, 이리 와서 머리 깎자."


    봄이는 역시 내 딸이다. 거의 언제나, 어디서나 낯을 가리고 수줍어한다. 아주 가끔씩 보는 미용실 부원장님이야 그렇다 치자. 최근에 자주 만난 친고모 앞에서도 고개를 돌리고, 심지어 어린이집 씨앗반에서 1년 동안이나 엄마처럼 돌보고 키워주신 이혜진 주임 선생님을 (잠시나마) 모른 척 하다니. 으이그~ 짜식아. 

     

    그런데 문득,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랐다. "으이그~ 짜식아. 사내 새끼가, 좀 똑바로 씩씩하게 말하고, 어른들 만나면 밝게 인사하고 그래야지. 그게 뭐냐? 계집애처럼." 우리 큰 아버지 댁은 종가집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사내니까 제사 드리러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명절 때마다 나를 큰 아버지 댁에 끌고(?) 가셨다.

     

    큰아버지 댁에는 명절 기간 내내 끝없이 친척이 찾아왔다. 너무 사람이 많이 와서, 사돈의 팔촌까지 싸그리 아주 잠깐이라도 들렸다 가는 듯했다. 당연히, 나는 그분들을 잘 몰랐다. 그런데 인사를 해야 한단다. 친척이니 친한 척을 해야 한단다. 나는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무척 고생스러웠다.

     

    단 한 번도 당시 내 심정을 충분히 표현할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는데, 만약에 그때 심정을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해 보라고 한다면...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아요. 그만큼 힘들어요." 라고 말하리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일도 힘들었지만, 부모님께서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시는 말이 훨씬 더 힘들었다. 

     

    "사내 새끼가..."

    "계집애처럼..."

    "으이그, 성격 봐라..."


    "맞아요, 저 내성적예요. 사람들 앞에서 많이 수줍어해요. 그래서요? 그게 뭐가 어때서요?"

     

    곰곰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다.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이 눈에는 좀 더 잘 띄겠지만, 그래서 사회적으로 좀 더 성공하는 듯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수줍고 내성적인 사람이 세상을 움직인다. 예를 들어 볼까? 연구에 따르면 한국 기업 CEO 중에서 내성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보다 두 배는 더 많단다. 뛰어난 리더로 평가받는 전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내성적인 사람이고, 마이크로 소프트 전 회장인 빌 게이츠나 저명한 투자자인 워렌 버핏도 무척 내성적인 사람이란다. 

     

    나 자신을 들여다 보면? 나는 참 많이 내성적인데, 덕분에 집중력이 뛰어나다. 무엇이든지 흥미가 땡기면 쉽게 집중할 수 있다. 어떤 때는,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내가 보는 대상 외에는 모든 사물이 사라진다고 느낄 정도다. 그리고 나는 글쓰기를 많이 좋아하고 글을 잘 쓴다는 평가도 종종 받는다. 단순히 글쓰기를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서 남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 글쓰기는 어떤 사람이 보유한 지적인 능력을 한 방에 보여주는 훌륭한 능력이다. 내가 글을 잘 쓴다면, 오로지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그렇다. 

     

    사실이 이런데도, 그동안 바로 내가 봄이에게 '내성적'이라는 말을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했다. 봄이 앞에서 은근히 내성적이면 안 좋다는 식으로 말하고 행동했다. 봄이가 사람들 앞에서 수줍어서 고개를 돌리면 슬며시 놀렸다. 아주 심하게 놀리지는 않았으니 아마도 봄이가 크게 상처받지는 않았을 듯하다. 하지만 분명히 나는 봄이에게 '내성적'이라는 부정적인 꼬리표를 붙였다. 

     

    봄이는 봄이다. 봄이가 타고난 외모든, 성격이든, 그 무엇이든, 전혀 문제 없다. 괜찮다. 물론, 살다 보면 때로는 외향적인 사람이 사회적으로 아주 조금 더 인정받는 상황을 만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때로는 봄이가 내성적이라서 크게 성공할 수 있고, 때로는 내성적이라서 삶을 더 깊고 넓게 누릴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건 봄이 인생이다. 언제나 봄이가 스스로 규정하고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봄이가 걸어갈 길에, 심지어 엄마나 아빠도 함부로 끼어들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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