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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산이 왜 병이에요?
    지식 공유하기(기타)/슬기로운 의사생활 2020. 4. 17.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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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산이 왜 병이에요?"

    먼저, 슬기로운 의사생활 6화 속에 나오는 대화록을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다.

     

    산모: 그럼... 습관성 유산... 그런 건가요?
    의사: (약간 냉정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네. 이번이 세 번째 임신이시네요? 이전 두 번은 모두 유산하셨고. 어... 임신 7주차시네요?
    산모: (울먹이며) 네... (다소 원망하는 태도로) 교수님은, 이런 병 가진 산모들 워낙 많이 보시니까, 이 정도 병은 병도 아니죠?
    의사: (약간 정색하며) 유산이 왜 병이에요?
    산모: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흑흑흑...
    의사: 유산은 질병이 아니에요. 당연히 산모님도 잘못한 거 없구요.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나, 앞으로 내가 뭘 조심해야 하나, 물어들 보시는데, 그런 거 없어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원인을 미리 알았으니까, 잘 대비하고 치료하면, 좋은 결과 가질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주사 잘 맞으시고, 당분간 안정 잘 취하세요.
    산모: (울음을 그치며) 네. 감사합니다.

    산부인과 전문의를 만나고 있는 산모는 자책을 하고 있습니다. 유산을 두 번이나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상식적으로 우리는 부모 탓을 합니다.) 이전에 유산했던 사실을 의사가 언급만 했는데도 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 정도 병은 병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리 냉정하게 말하는 거냐고요. 그런데 의사가 약간 정색을 하며 말합니다: "유산이 왜 병이에요?" 

    이 짧은 대화에서 저는 감탄을 했습니다. 마치 스스로 자신을 죄인처럼 취급하고 있는 산모의 생각 - "유산은 병이고 다 내 잘못이야" - 을 부드럽지만 정면으로 부인하는 대사. 이 대사는 전문가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기 때문에 권위가 있습니다. 그동안 산모가 자신을 부정적으로 규정해 온 생각을 순간적으로 산산조각을 내고 새로운 생각을 구성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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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결중심모델과 이야기치료는 포스트모던 가족치료 모델로 개발되었습니다. 이전 모델에서는 상담자를 전문가로, 내담자를 비전문가로 취급했습니다. 내담자는 자신의 문제를 푸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뭔가 많이 배워서 알고있는 전문가(상담자)에게 찾아와서 해결 방법을 묻는 겁니다. 내담자가 자기 사정을 상담자에게 자세하게 말하고 나면, 상담자는 그 정보를 잘 듣고 취합해서 사정하고, 해석하고, 마침내 답변을 내어 놓습니다. 이것이 상담에 관한 상식적인 이미지입니다. 

    반면에, 포스트모던 가족치료에서는 내담자 가족을 자신의 삶과 문제를 푸는 방법에 대한 "전문가로" 대접합니다. 그래서 내담자의 문제/해결책에 대해서 잘 모르는 비전문가인 상담자가, 뭘 좀 알고 있는 전문가인 내담자에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내담자는 문제가 악화되지 않도록 만들고, 실질적으로 문제도 풀어나가는 힘(강점/자원)과 노하우를 말해 줍니다. 명백하게, 질문은 답변자를 해당 질문의 주제에 대해서 뭘 좀 아는 전문가로 인정하고 대접하는, "권력 관계가 역전된" 언어 형식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해결중심모델이나 이야기치료에서는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상담자가 웬만하면 내담자에게 충고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정보도 제공하기를 꺼립니다. 특히, 개인의 권리와 정체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해결중심/이야기치료 실천가는 본인 눈에는 다소 명백해 보이는 판단이나 해석조차 내담자에게 말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상담자가 말한 내용이 내담자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며, 개인의 주체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단히 관계적이고 수직적인 한국 문화 속에서도 과연 이러한 방식이 (무조건) 옳은 것일까요? 예컨대, 한국 문화에서는 사람들이 상담자를 일종의 선생님으로 여기고 자신을 학생처럼 여기면서, 상담자에게 조언(지혜의 말씀)을 청하고 듣고 싶어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을 내면화하고 있는 정도는 개인마다, 연령대마다,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존재합니다. 저는 모스트모던 가족치료의 특성과 한국 문화를 절충시키는 방법을 오랫동안 고민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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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상담자가 상담자로서 가지고 있는(내담자가 부여하는) 권위를 활용해서,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자아상을 깨어 부수고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리프레이밍입니다. 포스트모던 가족치료에서는 전통적인 모델에서 상담자에게 부여한 과도한 권위를 극단적으로 싫어한 나머지, 상담자가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과 경험을 깡그리 부정하고, 내담자를 마치 신적인 권능을 가진 존재로 여겼습니다.

    저도 이러한 통쾌한 역전의 쾌감 때문에 해결중심모델과 이야기치료의 매력에 빠져든 것이었지요. 하지만, 예외는 늘 있게 마련입니다. 쓸데 없는 권위주의는 독이 될 뿐이지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의사의 권위는 어떤가요, 쓸데 있는 권위가 아니었던가요? 죄책감과 미안함에 짓눌려서 힘들어 하고 있는 산모를 도와서 해방감을 느끼게 하잖아요. 이런 인간적인 권위도 우리는 깨끗하게 분리수거 해야 하는 걸까요?

    물론, 모든 개입 과정을 질문으로 일관해서, 문자 그대로 손 안대고 코를 풀 수만 있다면 가장 이상적일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아하게 질문만 날려서 내담자가 자신을 새롭게 규정하도록 만든다면 가장 있어 보이고 멋져 보일 겁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이러한 완벽한 질문-응답 장면으로 끌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럴 때, 바로 그럴 때 전문가로서 가지는 권위를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리프레이밍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잘 음미해 보세요: "(정색하며) 유산이 왜 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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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기로운 의사생활, 을 통해서 배우는 상담 (https://vo.la/xU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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