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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 너 왜 이제 와. 빨리 와.
    지식 공유하기(기타)/돌아오라 1988(공감 텍스트) 2022. 3. 3.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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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장: (반 친구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야! 조용히 좀 해~ 니들 대학 안 갈거야?

     

     

    덕선: 야, 네가 더 시끄러워. 공부만 잘하면 다야? 

     

     

    반장: 우리 고3이거든?

     

     

    덕선: 알거든! 

     


    (덕선이가 반에 돌아왔을 때 친구들이 교실 가운데 모여서 웅성대고 있다.) 

     

     

    (반장이 누워서 입에 거품을 물고 뇌전증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 

     

     

    덕선: (잠시 상황 파악을 한 후) 비켜! (책/걸상을 치워서 공간을 만든다.) 절루 가, 너희들 보지 말고 절루 가! (반장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셔츠 단추를 풀어준다.) 문, 야! 문! 

     

     

    반친구 A: (얼른 문을 닫고 창문을 몸으로 가린다.)

     

     


    반장: (양호 선생님에게) 저, 또 쓰러졌죠. 선생님. 애들, 다 봤겠네요. 흑흑흑... 

     

     

    양호 선생님: (반장의 등을 토닥이면서) 괜찮아, 괜찮아. 

     

     


    반장: (민망한 듯, 어두운 표정으로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온다.) 

     

     

     

    학생A: (미소를 띈 채, 아무렇지도 않게) 반장, 추워. 문 닫아. 

    반장: 응.

     

     

    덕선: (반장에게) 야, 너 왜 이제 와. 빨리 와.

    왕자현: 야, 빨리 와서 네 도시락 좀 꺼내 봐. 소시지 좀 먹자. 

     

     

    장미옥: 야, 나보다 훨씬 좋은데? 완전 캡이다!

     

     


    반장 엄마: (학교 앞에서 만난 덕선에게) 아줌마가 한 번 안아봐도 될까? (껴안은 채 울먹인다) 고맙다, 덕선아. 아줌마가 너무 너무 고마워. 

     


    반장 엄마: (학기 초, 학교 안 벤치에서 덕선에게 딸을 부탁하면서) 미안해, 학생. 꼭 부탁해. 어려운 거 없어. 혹시 쓰러지면 주위에 위험한 물건들만 치워주면 돼. 그리고 양호실로 데려다 주면 돼. 응? 

     

     

    덕선: 네.

    반장 엄마: 아, 혹시 토할지 모르니까 고개만 옆으로 살짝 돌려주면 되고. 부탁할게, 학생. 아줌마가 너무 미안해.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반장은 늘 공부 잘 하는 학생이 맡곤 했다. 솔직히, 반장은 학생들을 대표하는 의미라기보다는 학생들이 학교 당국이나 담임 선생님 통제에 잘 따르도록 통제하는 기제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작은 담임 선생님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어른들이 시키는) 공부를 (별 말 없이) 잘 하는, 그런 모범생에게 맡길 수밖에. 이 장면에 나오는 반장도 (선생님이 안계시는) 자율학습 시간에 30cm 자를 책상에 딱딱딱 내리치면서 (마치 선생님처럼)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한다. 

     

    그런데 도도해 보이는 이 반장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아마도) 뇌전증(간질)을 앓고 있는 것 같다. 학기초 어느날, 덕선이가 교실로 돌아왔을 때, 반장은 교실 바닥에 누워서 거품을 물고 발작을 하고 있고, (뇌전증 증세가 생소한) 반 친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웅성거리면서 보고만 있었다. 이때 덕선이가 과감하게 행동에 나선다: 책상을 치워서 공간을 만들고, 다른 반 친구들이 '구경거리'를 보러 오지 못하도록 교실 문을 막도록 조치하고, 반장이 편하게 있도록 셔츠 단추를 풀고, 기도 확보를 위해서 고개를 옆으로 젖혀 주었다. 뇌전증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구나 아직 어린 고등학생이라면, 그냥은 이렇게 순발력 있게 할 수 없었겠지. 

     

    쓰러지기는 교실에서 쓰러졌으되, 정신은 양호실에서 차린 반장은 머릿 속에 온통, '반 친구들이 내 증상을 봤을 텐데, 앞으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친구, 공부만 잘 했지, 아직 어리다. 자기 건강보다는 친구들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가 훨씬 신경쓰일 때다. 양호 선생님이 괜찮다, 며 반장의 등을 토닥여 주지만, 반장은 울음을 그치기가 어렵다. 너무너무 X팔리고, 창피한 일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반장이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을 하면서 우울 모드로) 교실에 돌아왔을 때, 반 친구들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무심한. 그리고 수용적인(inclusive). 반장이 교실로 들어와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문 바로 옆에 앉은 친구. 나도 예전에 학교 다닐 때 문 옆에 앉아 봤는데, 참 고역이었다. 무신경한 남학교 친구들이 항상 문을 열고 다니니까, 매번 내가 문을 닫아야만 했다. 그러니까 문 옆에 앉아 있던 친구는 대단히 통상적인 반응("반장, 문 닫아")을 보인 건데, 겉으로는 명령 혹은 청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심하고 수용적인 말이다. 고등학생이니 설마 친구들이 반장을 뇌전증 증세를 가지고 놀리지는 않겠지만, 뭔가 원숭이 바라보듯 이상한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었는데, 반 친구들은 그냥 전과 똑같이, 평소와 똑같이 반장을 대한다. 

     

    덕선이와 자현이도 마찬가지. 먹성 좋은 고딩에게 점심시간 혹은 쉬는 시간은 만찬 시간이지. 온통 관심은 누가 얼마나 맛있는 반찬을 싸 왔는가, 일 터. "야, 너 왜 이제 와. 빨리 와." 덕선이가 한 말은 "네가 어디에, 왜 가 있었는지는 관심 없어" 내지는 "네가 어디에, 왜 가 있었는지 (아예) 몰라" 정도 느낌이다. 그리고 "야, 빨리 와서 네 도시락 좀 꺼내 봐. 소시지 좀 먹자." 자현이가 한 말도 초점이 반장이 보인 뇌전증 증세가 전혀 아니다. 반찬이다. 80년대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귀한 음식이었던 소시지 반찬, 이 주된 관심사. 

     

    그 다음 장면은, 반장이 뇌전증 발작을 일으켰던 순간에 덕선이가 어떻게 침착하고 신속하게 상황을 정리했는지, 그 이유가 나온다. 그러니까... 반장 엄마는 고3이 되면서 딸내미와 짝꿍이 된 덕선이를 따로 만났고, 그 자리에서 딸이 가진 뇌전증 증상과 혹시라도 증상이 발현되었을 때 어떻게 도와 주면 되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우리 착한 덕선이는 반장 엄마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실천했다: 반장에게 발작이 일어났을 때, 위험한 물건 치워주고, 기도 확보하고, 양호실로 데려다 주기. 그리고 반장 엄마가 구체적인 말로 설명해 주진 않았지만, 덕선이가 스스로 (아마도 본능적으로) 알아 들은 원리: 무심한, 그리고 수용적인 태도.

     


    사실, 여전히 우리는 장애 이슈와 관련하여 의료모델이니 사회모델이니 이런 말을 많이 하지만, 이런 개념만으로는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장면은 시청자에게, 장애가 얼마나 사회적인 특성을 가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우리는 손상에 대한 생물학적인 이해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덕선이처럼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당사자를 어떻게 도와 줄 수 있을지(물론, 본인이 원하는 만큼, 원하는 방식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생물학적인 증상이나 다른 면을 지나치게 대상화하지 않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수백가지 특성 중 하나로 이해하는 태도다. 딱히 놀라울 것은 없다, 는 무심하지만 배려하는 수용적인 태도. 

     

    그래서 반장도, 반장 엄마도 덕선에게, 그리고 반 친구들에게 많이 고맙다. 반장도, 반장 엄마도 사람들에게 원하는 바는, 아무리 많이 따져봐도 '이상하게 바라보지 말아 줘', '그냥 특성으로 이해해 줘', '그냥 보통 사람처럼 대해 줘',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지도 말고,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무시하지도 말아 줘' 정도에 불과하다. 덕선이와 반 친구들은 반장과 반장 엄마가 바라는 딱 그런 방식으로 반장을 대했다. 그러니까, 무심하지만 수용하는 태도는, 출발점이 공감(empathy)이다. 그리고 공감이란 상대가 무엇을, 왜 원하는지 알아야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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