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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돈만 놓고 갔어지식 공유하기(기타)/돌아오라 1988(공감 텍스트) 2022. 2. 5. 09:40728x90반응형
쌍문동 아이들 무리 중에서 가장 외각에 있는 듯한 동룡. 캐릭터 설명을 들여다 보니 이런 말이 써 있다:
"쌍문동의 카운슬러로 인간관계의 모든 해법을 제시해주는 해법 선생"
오늘 에피소드는 어떻게 동룡이가 해법 선생이 되었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정환: 집에 안 갈 거면, 자고 가든가.
정환이네 집에서 마광수 교수가 쓴 책(당시로서는 금서)을 탐닉하고 있던 동룡. 집에도 안가고 읽고 있는 동룡이에게 정환이가 자고 가라고 권한다.
동룡: 안돼, 나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해. 집에 가서 잘 거야.
정환: 어디 가? 너 내일 생일 아냐?
동룡: 어. 엄마가 내일 아침에 직접 밥 해 주신대.
그런데 동룡은 굳이 집에 가서 자야겠단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단다. 엥? 왜? 내일이 동룡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정환으로서는 의아한 일. 뭔가 근사한 곳이라고 가나? 어딜 가냐고 물으니, 동룡이 다소 허무한(?) 대답을 한다. 엄마가 아침에 직접 밥 해주시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집에 간단다.
정환: 진짜? 너희 엄마가 밥을 해 주신다고?
푸핫! 동룡 엄마가 밥을 직접 해 주신다는 사실이, 정환에게도 놀라운 일이긴 한가부다.
동룡: 어. 엄마가 내일 내 생일이라고, 직접 미역국이랑 불고기랑 해 주신대. 나 엄마가 해 주는 밥, 몇 달만이다. 허, 이게 말이 되냐?
정환: 아~ 축하한다.
동룡: 고맙다.
동네서 누구네 집에서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 귀신같이 알고 달려와서 숟가락 들고 대기하던 동룡. 처음에는 '쟤는 무슨 거지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역시 나름대로 다 사연이 있다. 동룡의 엄마는 7년 동안 보험왕 자리를 놓치지 않은 '전설적인' 보험 외판원.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시는라 정신이 없다. 형제만 다섯. 먹여 살려야 할 입이 많아서다. 교사로 일하고 있는 동룡의 아빠도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서 (당시까지만 해도 불법이었던) 과외 일을 뛰고 있다. 그래서 엄마가 집에서 밥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동룡은 감격한다. 그리고 정환은 동룡에게 축하까지 한다. 집에서 엄마가 해 준 밥 먹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동룡: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왔는데, 엄마는 없고, 식탁 위에 메모만 있다.)
동룡 모: (메모에서) 동룡아, 엄마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일찍 나간다.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 먹어~ 사랑해! 엄마가.
어이쿠... 이걸 어쩌나... ㅠㅠ
동룡: (식탁 위에 엄마가 남겨둔 3만원을 내려다 본다)
엄마도 없고, 미역국도 없고, 불고기도 없다.
동룡: (완전히 실망한 표정)
(보라, 선우, 정환, 동룡이가 보라 차에 타고 있다.)
결국, 동룡은 이날 가출을 했다. 대천해수욕장에 있다는 전화를 받은 친구들이 보라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동룡을 구하러(실을 납치하러) 다녀온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동룡이 속상했던 이야기를 꺼낸다.
동룡: 어제 내 생일이었는데, 아침에 밥 해 주시기로 했거든. 근데 돈만 놓고 갔어. 엄마는 자식보다 고객이 더 중요해. 내 소원이 뭐게? 우리 엄마가 제일 잘 하는 요리가 있어. 미역국. 늬들도 알다시피, 조부장님이랑 학주, 어렸을 때부터 밥 벌이 했잖아? 그래서 형들이랑 나 맨날 나가서 밥 사 먹었고. 아니면 너네들 집에 가서 얻어 먹던가. 근데, 그 생일만큼은, 딱 그냥 그 하루만큼은 엄마가 미안한지 미역국에 소고기 이따시 만한 거 들어간 거, 끓여 주시곤 했는데. 그 보험왕인가 뭔가 되고나서부터는 몇 년째 먹어 본 적이 없어. 에휴~ 올해는 그래도 미역국이나 한 번 얻어 먹어보나 했더니... 아이고~ 내 팔자야.
공감이란,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고통스러웠던 일에서 출발한다. 타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서, 타인의 눈으로, 타인이 바라보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타인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이해하는 게 공감 아니던가. 내가 그가 아닌데 어떻게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며,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꼬. 내가 직접 경험하지도 않은 그 온갖 감정을 어떻게 타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이해할 수 있을꼬. 아무리 세상 천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온갖 경험을 쌓는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의 모든 감정을 세세하게 느끼고 경험할 수는 없지 않나.
그렇다. 공감이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이 자연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폭이 넓지 않다는 한계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공감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을 누구나 찾아야 하고,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출발점은 고통이고, 출발점을 떠나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고통에 대해서 돌아보는 노력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고통은 본질적으로 균질하다. 우리 모두는 엄연히 각자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고통을 감내하는 매커니즘은 유사해서 내가 겪은 고통을 잘 들여다 보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공감 능력은 선천적인 능력일까, 아니면 후천적인 능력일까. 이런 고전적인 질문에 답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인간 능력과 유사하게, 공감 능력도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얼마든지 후천적으로(즉, 경험과 학습으로) 향상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바로 증거다. 공감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해서 정말 크게 코를 다치고 나서(힘든 경험을 하고 나서), 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고, 일정하게 개선이 이루어지고 나니,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면서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
그래서 동룡이가 처량하게 엄마가 남기고 간 3만원을 내려다 보는 장면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동룡이가 '쌍문동의 카운슬러로 인간관계의 모든 해법을 제시해주는 해법 선생' 된 이유를. 뜬금없이 질문해 본다. 남자들은 어째서 눈치가 없는 걸까? 간단하다. '(남존여비 사회에서는) 타인의 눈치를 볼 일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동룡은 어떻게 좋게 말하면 공감 능력, 나쁘게 말하면 눈치 보는 능력이 발달한 걸까. 이해받지 못한 경험, 원하는 바가 좌절된 경험이 많아서. 자기가 겪은 고통을, 타인의 마음을 넓게 이해하는 공감 능력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에.
그런데 아마도 동룡은 기본적으로는 밝은 친구 같다. 그러니 엄마, 아빠에게 당한 온갖 억울한(?) 일을 '공감 능력 향상'이라는 좋은 결과로 승화시켰겠지. 그러니까 고통스러운 일을 많이 겪은 사람이 무조건 공감 능력이 높은 건 아니다. 그 어떤 고통스러운 일을 겪는다고 해도 절대적인 비관으로는 빠지지 않는 낙관주의. 그리고 자기 경험을 넓고 깊게 들여다 보면서 타인에게 향하는 공감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반성 능력. 이 모든 이야기는 동룡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품어 본 내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뼈를 깎으면서 나를 돌아봤던 결론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똘똘한 후배 O와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쓰는 공감 스토리에 관한 대화였다. "제가요, 드라마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어쩌면 시간 낭비라고도 생각했는데, 선배 글을 보면서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까지 써 오신 글을 보면서, 저도 드라마를 보면서 비슷하게 생각했던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뻤다. 원조 전문가로서 드라마를 재미로만 보지 말고, 다양한 인간 군상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하자는 게 내 취지였기 때문이다. 생각하면서 보면, 드라마도 사회사업에 도움이 된다. 똘똘한 O처럼.
동룡의 대사를 음미하면서 우리 한 번 느껴보자. 공감해 보자. 동룡의 마음을:
"근데, 돈만 놓고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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