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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 한국이구나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3. 9. 22.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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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한국이구나

    2019년 8월 17일. 드디어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30일 만에 돌아온 한국땅. 나는, 그해 7월 중순에 서울에서 출발, 프랑스 파리를 거쳐서 떼제베(TGV)를 타고 스페인 접경 지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 스페인 중북부 지역을 가로질러서 세상 끝까지 총 850km를 걸었다. 많은 사람이 평생 한 번쯤은 걷고 싶어하는 바로 그 길, 산티아고 순례길.

    아, 제발 부러워하지는 마시라. 여유가 넘쳐서 가지도 않았고, 단순히 재미로 가지도 않았으니까. 사실은 막다른 골목에 갇혀서 이러다가는 정말로 죽을 것 같아서 갔으니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 세상 끝까지 가 보자고 생각해서 갔으니까. 길을 다 걷고도 허무하면, 죽어버려야겠다고 결심하고 떠난 길이니까. 아무 대책 없이 떠난 길이니까.

    어쨌든 살아서 돌아온 길, 돌아와서 다시 맡은 서울 공기는 어떨지 궁금했다. 공항 버스에 올라 타서 당시 주소지였던 부천까지 갈 때까지만 해도 돌아왔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나른한 휴일 오후, 오지 않은 낮잠을 억지로 청해서 잠들었다가 문득 깨서 멍~한 기분이었달까. 그런데 송내역에 내려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잡아 타기 위해서 기다릴 때 알았다.

    여기, 한국이구나.

    버스 앞문까지 사람들이 뛰었다. 5미터 남짓 되는 거리를 움직이는 동안, 서로 가볍게 밀고, 버스에 뛰어 오르고, 자리를 차지하기 바빴다. 누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앞서 가는데...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뭐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뛰지? 안 뛰면 버스를 못 타나? 저 버스를 못 타면 무슨 일이 생길까?' 평생, 사람이 바글바글한 서울에서 살았는데 이상헀다.

    낑낑대며 여행 가방을 버스에 싣고 손잡이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그제서야 내가 왜 버스 정류장에서 뛰어가는 사람들 모습을 낯설게 느꼈는지 깨달았다. 문화...충격? 나는 문화충격을 느꼈다. 스페인에서 겨우 30일 동안 체류했는데, 한국에서 산 기간이 엄청나게 더 긴데, 돌아오자마자 적응을 못한 듯하다. 마치 이방인처럼.

    "여기 사람들은 너무 천천히 살아. 경제적으로 가난해도 문제 의식이 없어. 병이야, 병." 마드리드에서 왔다는 데이비드는 이렇게 말했다. 미디어 업계에서 일하다가 경제 위기 때문에 실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서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러 왔단다. 과연, 현지에서 내가 만난 스페인 사람들은 적어도 한국인보다는 여유로웠다. 늘 뛰진 않았달까.

    여기, 한국이구나.

    나는 종종 사회복지관에서 사례관리 사례 자문 요청을 받는다. 실무자께서 이메일로 보내 주신 문서 파일을 열어 본다. 깔끔하게 정리된 텍스트 사이로, 당사자께서 어떻게 살아오셨는지가 보인다. 그런데, 나 같은 외부인에게 자문을 요청할 정도면 개입하기 어려운 사례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내가 봐도 딱히 시원한 답이 안 나올 가능성이 높다.

    세세한 사례 이야기는 접어 두고, 사례 자문 요청서를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바를 말하고 싶다. 우선, 사회복지사도 한국 사람이라고 강하게 느낀다. 한국인은 '정상적인 삶은 이런 거야', '사람은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해' 라는 단일한 기준을 마음 속에 품고 산다. 그래서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바로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고 대단히 불안해 하고 힘들어 한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상태로 살아간다면? '빨리'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갈 때는 무조건 목적지까지 바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을 찾아야 한다. 절대로(!) 시간을 허비해선 아니 된다. 결승점까지 최대한 효율적으로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잘 안 보이면? 곧바로 모든 '의미'가 증발된다. 너무나도 답답하다고 느끼고, 무의미하고 공허하다고 느낀다.

    여기, 한국이구나.

    우리가 늘 하는 말: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거의 모두 이 말에 동의하리라.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못 기다린다. 안 기다린다. 문 닫고 출발해 버린다. 왜 못 좇아 오냐고 이상하게 쳐다본다. 평탄하게 살아온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 힘든 일(즉,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상황)을 겪은 사람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속도'로 빨리 걸어오라고 요구해 버린다.

    나는, 법륜 스님께서 베푸시는 '즉문즉설' 방송을 즐겨 본다. 스님이 말씀해 주시는 조언이 다 맞지는 않겠지만, 나는 스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대단히 낯설게 느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시는 내용이 좋다. 목표물을 금방이라도 손에 넣을 듯 가깝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착시 현상이고, 근본적으로는 '욕심'이라는 깨달음.

    기억하기로는, 2019년 8월 17일, 송내역 버스 정류장에서 낯설게 느꼈던 엄청난 속도감을 다시 내 몸에 체득하는데 보름 밖에 안 걸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버스 정류장에서 뛰어 다녔다. 사람들 어깨를 밀쳤다. 어떻게든 자리를 차지해 보려고 애썼다. 허나, 오늘 아침 문득 그렇게 뛰어 다니는 내 모습, 사람들 모습이 다시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한다.

    여기, 한국이구나.

    2023년 9월 22일 새벽,
    이재원 씀.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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