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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일기장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4. 4. 2. 06:48728x90반응형
글을 쓸 시간은 없는데 일단 쓴다면 잘 쓰고 싶어서 괴로워하는(?) 학생들 모습을 지켜 보면서, 문득 어머니 일기장 생각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40대에 접어들고 나서야 제대로 한글을 배우셨다. 정확하게 시점을 말한다면, 1994년 봄. 내가 큰 학교(大學校)에 입학했을 때였다. 당시 어머니는 매일 새벽 여의도 증권가 건물로 출근하셔서 뼈가 빠지도록 청소해서 생활비를 버셨다. 그 피같은 돈으로 아들 먹일 우유도 사시고 학비도 대셨다. 그리고 당신은 한글을 공짜로 가르쳐 주는 교회 야학에 다니셨다.
한글 선생님을 참 잘 만나셨다. 당시 야학에서는 30년 넘게 중학교에서 국어 과목을 담당하신 선생님께서 한글을 가르치셨다. 이 선생님께서는 아주머니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신 후에, 일기 쓰기 과제를 내 주셨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 시절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일기를 잘 써서 야학 선생님에게 칭찬 받았다고 종종 내게 일기장을 보여 주셨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가 크게 감동받았다. 글씨는 삐뚤빼뚤, 맞춤법도 자주 틀리고, 정말 아무 내용도 아니었는데, 무심코 읽다 보면 마음이 움직였다.
(1994년) 3월 26일 토요일. 날씨: 조금 흐림.
아침 드라마 자매들이 끝나고 서둘러 매주 토요일이면 채소를 실은 트럭이 오는 곳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너무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구경 거리는 많았다. 나는 오이를 오천원 어치 사고 당근 천원 어치를 샀다. 너무 다 팔리고 물건이 별로 없었다. 너무 사람들이 많아 질서가 하나도 없어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내가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두 가지만 사가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 다음 토요일부터는 9시 되기 전에 빨리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맨 먼저 채소를 사 가지고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가만히 들여다 보니, 일기 내용 아래에 야학 선생님께서 본인 평가를 적어 주셨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잘 쓰셨습니다. 라디오 여성시대에 한 번쯤 투고해 보셔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역시, 국어 선생님이시다. 글쓴이가 일기에 심은 가치를 정확하게 포착해서 쓰셨다. 선생님 평가처럼, 어머니 일기는 솔직하고, 쉬우며, 깊다. 사물에 비유하자면 거울처럼 맑은 연못이다. 그래서 일기를 읽는 사람도 미소를 지으며 읽다가 불현듯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하고 선명하다.
일기를 이렇게 투명하게 쓰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 문장 길이나 표현법은 본질이 아니다. 그보다는 글감(사건) 선택이 본질이다. '지금 여기서 딱 떨어지는 작은 이야기'를 선택해야 한다. 이야기가 구구절절하게 잔가지를 뻗으면 안 된다. 옛날 생각이 떠올라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면 안 된다. 초점이 흐려진다. 요약하자면, 일기를 쓰는 태도는 맑디맑은 연못에 얼굴을 비추듯 솔직하게 취하되, 가급적 오늘 내가 직접 경험한 작은 에피소드에 집중해야 한다. 선택한 이야기가 작아야 부담없이 쓸 수 있다.
<사회복지사 자기-돌봄 글쓰기 모임 - 글로위로, 2023년 작품집>
<평범한 사회복지사들이 글로써 소박하게 자기 삶을 정리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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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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