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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듣보잡 해결중심 검객 論: 나의 이야기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0. 4. 11.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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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듣보잡 해결중심 검객 論: 나의 이야기. 

     

    듣보잡, 이라고 써 놓고 보니, 곧바로 양원석, 이라는 이름부터 떠오른다. 후후. 

     

    다시, 그 사연을 기억 서랍에서 꺼내 본다. 때는 바야흐로 2018년 하고도 9월. 박사과정 코스웍을 막 끝낸 직후였다. 솔직히, 나는 박사과정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얘, 안되겠다. 너 그냥 두면 진짜로 폐인 되겠어. 그렇게 있을 바에는 그냥 학교로 오는 게 낫지. 넌 우리 학부 출신이니까 입학 때도 혜택이 있을 거고, 조교 하면 장학금도 나올 거야. 여러 말 할 것 없고, 바로 면접 보고 등록해." 2014년 가을, 은사님이신 성공회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김유순 교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나를 "밀어 붙이셔서" 박사과정에 들어왔던 거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찌저찌 코스웍을 끝내긴 했지만... 그 다음 동력이 부족했다. 아니지,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동력 따위는 전혀 없었고, 그냥 "멍~" 한 상태였다. 

     

    그날도 아침에 잠에서 깨 보니, 턱 근처 이부자리에 침이 흥건했다. 초가을, 아직도 여름 더위가 덜 빠진 봉숭아 물처럼 흔적이 남아 있던 터라, 빤스 한 장만 걸치고 잤는데도 열기가 후끈거렸다. 나는 침을 닦으면서 생각했다: "이재원!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그리고 진짜로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니?" 응? 진짜로 하고 싶은 거? 글쎄다... 그런 게 마음 한 귀퉁이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재원: 솔직히, 책을 쓰고 싶다. 
    재원2: 엥? 책을 쓰고 싶다고? 
    재원: 응, 책, 을 쓰고 싶네. 
    재원2: 무슨 책? 
    재원: 해결중심모델 관련 책을 써야 하지 않을까? 
    재원2: 에이... 아서라. 네 주제에 무슨 책이냐. 책은 뭐, 아무나 쓰냐? 
    재원: 아냐, 잘 들어 봐. 내가 이걸 5년 넘게 공부해 왔는데, 이젠 때가 된 것도 같아. 
    재원2: 음... 너나 내 말을 잘 들어 봐. 백 번 양보해서 책을 쓴다 치자, 네가 "듣보잡"인데 그 책을 누가 읽냐? 책 써서 너만 읽으려고? 책은 누가 읽는 것을 전제하는 건데,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써서 뭐하냐? 
    재원: 그건 인정. 완전 인정. 나, 듣보잡 맞아. 하지만 뭔가 작은 시도라도 해 보고 싶어. 이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재원2: 어라? 점입가경일세? 글쎄, 안된다니깐? 

     

    무시하기로 했다. 힘든 시기를 거쳐 온 후 얻은 교훈 딱 한 가지: "하고 싶은 일만 하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하지만 그에게도 "일리"는 있었다. 책이란 게 일종의 "소통창구"인데, 나만 보는 책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양. 원. 석. 

     

    맞다. 이 양반에게 연락해 봐야겠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나는 양원석 선생님이 이렇게 유명한 인물인지 몰랐다. 수 년 전, 체계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어느 블로그에서 "생태체계이론" 이라는 책을 무료로 올려 두고 배포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양원석 선생님의 책이었다. 당장 pdf 파일을 다운 받아서 정독을 하고 글에 대한 내 생각을 이메일로 말씀 드렸다. (뜬금없이 연락드린 이 듣보잡 의견을 매우 신중하고도 겸허하게 수용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언젠가 박사과정 선배들과 함께 하던 가족치료 스터디에 이 양반을 초대한 것, 정도가 우리 인연의 전부였다. 

     

    그분의 페이스북 친구 숫자를 보니 3,500명이 넘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아, 이 양반 등에 업히면 내가 쓸 책을 널리 퍼뜨릴 수 있겠군."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양원석 선생님, 이재원입니다. 접때 왜 가족치료 스터디에서 모셨던..." 선생님에게 내 생각을 말씀 드렸다: "주로 제네럴리스트 사회복지사 동료들을 대상으로 해결중심모델과 이를 적용한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는 책"을 쓰고 싶다고. 

     

    "좋아요, 선생님. 마침, 저도 해결중심모델에 대해서 공부해 보고 싶었거든요. 그러면, 우선은 저에게 보여 주실 수 있는 원고가 일부라도 있을까요?" 

     

    전화를 끊고 나서, 이부자리에 흥건하던 침 자국을 닦아 낸 후,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해결중심모델의 개발 역사, 라는 제목을 쓰고 키보드가 망가지도록 열나게(?)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다닥, 다다닥, 다다다다닥, 마치 내 손가락이 아닌 듯, 일필휘지(!)로 냅다 달렸다. 거의 쉬지 않고 원고를 작성하고 나서 정신을 차려 보니 A4지 원고 수십 매가 나와 있었다. 그 순간, 약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이거 되겠구나!"

     

    그렇게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_ 매주 화, 목요일에 페이스북을 통해서 짧은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_ 내가 원고를 쓰면 양원석 선생님께서 매번 발문을 달아 주셨다. 
    _ 한 달쯤 후부터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이거 누구지?" 라는? 
    _ 대략 육 개월 후부터 강의를 요청하는 연락이 왔다(2019년 3월). 
    _ 한 해 동안 여기 저기에 불려 다니며 해결중심상담을 강의했다. 
    _ 2020년을 맞이해 "강점관점실천연구소"라는 이름을 걸고 독립했다. 

     

    나는 왜 책을 쓰고 싶었던 걸까? 

     

    "소통"이(었)다. 내 생각을 알리고, 그에 대한 동료들의 생각과 질문을 듣고, 그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하고... 말하고... 말하고... 이렇게 나와 동료들 사이에 말이 계속 오고 간다면? 일종의 커뮤니티가 생겨날 거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전하려는 메시지(컨텐츠)는 무엇이었을까? 

     

    "유연한 해결중심모델"이(었)다. 책 원고를 쓰면서 자연스럽게 "제너럴리스트 사회복지사 동료들"을 대상으로 삼게 되었는데, 오래 전부터 품어 오던 생각이 많았다. 해결중심모델은 한 마디로 "클라이언트의 긍정적인 면만 보자"는 이분법에 기초해 있다. 문제에만 집중해 온 일선 사회복지사들은 이러한 이분법을 환영하면서도 해결중심모델을 실제로 적용하려고 하면 여러 가지 불편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해결중심 이분법을 따르자면 기존에 사용하던 효과적인 수많은 방법을 포기해야 하는데, 이는 어렵기도 하거니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단순히 해결중심모델만 적용하기에는 제너럴리스트 사회복지사들이 맞대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도 복잡 다단하고, 그러므로 대단히 절충적인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절충으로 나아가는 그 길 위에, 내 인생에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해진 주제가 놓여 있다: 정서(emotions). 전통적으로, 해결중심모델은 클라이언트의 정서를 도외시한다는 비판/비난을 받아왔다. 해결중심모델에서는 왜 정서를 외면하는 걸까? 정서는 부정적인 일에 관련되어 있고, 부정적인 일은 과거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서를 이야기 하기 시작하면 부정적인 과거 일에 대해서, 그 부정적인 일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 파헤치게 될 터인데, 바로 이 부분이 해결중심모델과 정확하게 반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서를 도외시하면서 상담을 한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는가? 당연히, 답은 아니올시다, 이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중심모델과 화해시킬 것인가? 이 질문은 해결중심모델을 배우기 시작한 직후부터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은 질문이면서, 나로 하여금 계속 공부를 하게 만드는 일종의 동기가 된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심리치료의 공통요인 이론을 배우고, 정서 지능을 공부하고, 인간 표정의 해부학적 특징을 나름대로 연구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만족스러운 답을 찾기 위해서 끝없이 나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길로 나아가는 나의 마음 속 태도는 무엇인가? 

     

    듣. 보. 잡. 듣도 보도 못한 잡놈, 이다. 

     

    예컨대, 젊은 벗, 이강열 사회사업가처럼,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왜 하필 "듣보잡" 같이 부정적인 말로 닉네임을 삼느냐고 묻는다. 허다하게 많은 좋은 닉네임 놔 두고 왜 하필 "듣보잡"이냐고 묻는다. 맞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듣보잡"이 좋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듣보잡은 자유롭다. 계보나 문파가 없어서 눈치를 안 봐도 된다. 만약, 효과가 있다면 그 어떤 방법도 시도해 볼 수 있다. 
    (2) 듣보잡은 겸손하다. 권위주의적일 수가 없다. 늘 낮은 자의 마음으로 갑(클라이언트, 교육생)의 말을 들어야 한다. 

     

    양원석 선생님은 나에게 (글로 해결중심모델을 배우신) 첫 번째 학생이자, 개인적으로/간접적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신 훌륭한 롤 모델이자, 언제든 고민을 털어 놓고 상의 드릴 수 있는 인생 선배님이다. 2019년 한 해 동안 수많은 좋은 사회사업가 선배, 동료, 후배들을 만났는데, 양원석 선생님은 그 중에서도 정점에 서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인정하듯이, (1) 양원석 선생님은 자유로우시다. 그리고 (2) 겸손하시다. 개인적으로 나를 대하실 때도 늘 두 가지 태도를 보이셨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되, 가치와 사람을 중심으로 겸손하게. 

     

    솔직히, 수 년 전, 세상이 무서워서, 폐인처럼 살고 있는 내가 너무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어서, 약 2 달 정도 문 밖으로 거의 나서지 못한 시기가 있다. 한 마디로, 그냥 혀 깨물고 죽고 싶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었다. 그러니 이때를 생각하면 지금 나는 이미 거의 "하늘을 훨훨 날고 있는 일종의 황홀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하하. 

     

    걱정이 안된다. 그리고 몹시 궁금하다. 내가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는지. 완벽하게 추락해서 밑바닥의 밑바닥, 그 밑바닥의 밑바닥, 또 그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몸소 느껴본 나다. 차디 찬 그 고통의 바닥을 뜨거운 뺨으로 느껴본 나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날아오를 하늘의 높이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는 계속 "듣보잡"으로 남고 싶다.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겸손하면서도 자유롭게 내 세계를 펼쳐 보고 싶다. 

     

    "재원씨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행복한 사람 같아요." 

     

    안지는 얼마 안되지만, 미네르바 동산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미 내 마음 속에 귀염둥이 정현경 누님 외에 또 한 명의 "착한 누님"으로 자리한 황신애 선배가 해 준 말씀이다. 참말로, 맞는 말 같다. 그리고 이제는 저 말씀을 현실적으로 구현해야 할 시점이 왔다. 전문 용어로, "때가 되었다."

     

    나는야, “듣보잡 해결중심 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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