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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릎 꿇고 빌었어
    지식 공유하기(기타)/슬기로운 의사생활 2020. 5. 15.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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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기로운 의사생활, 제 10화 중에서>

    도재학: 관장 안하면 진짜 위험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죠? 환자는 죽어도 싫다고 그러고, 천명태 교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그러고. 교수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요?
    김준완: (한숨)
    도재학: 그냥... 냅둬요?
    김준완: 환자 죽일거야? 당장 가서 환자 관장해, 이 새끼야. 네가 갖고 있는 모든 어휘력, IQ, EQ, 초능력 다 동원해서 환자 설득해서 관장해. 의사가 환자 포기하면, 그날로 의사는 끝이야. 뭐 해, 빨리 안가고. 
    도재학: (튀어간다)

    용석민: 관장은 하셨어요? 딸기농사 한다는 분?
    도재학: (긴 침묵 후에) 했어. 
    안치홍: 다행이다. 아니, 어떻게 설득하셨어요? 죽어도 안한다고 하셨다면서요. 
    도재학: (침묵) 빌었어. 무릎 꿇고 빌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더라구. 그래서 무릎 꿇고 빌었어. 오늘 관장 안하시면 환자분 돌아가신다, 그러면 천명태 교수님은 괜찮을 수 있지만, 나는 아마 짤릴 거다. 나 안 짤리게, 제발, 관장 좀 해 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어. 

    도재학: 환자 가족이 준 선물 꾸러미 속에서 편지를 발견한다.
    편지 속 환자 메시지: "저를 포기하지 않아 주어 고맙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

    관장을 해야 사는데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환자 때문에, 도재학 선생이 김준완 교수를 찾아가서 묻는다: "관장 안하면 진짜 위험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죠? 환자는 죽어도 싫다고 그러고, 천명태 교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그러고. 교수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요?" 물론, 우리의 냉정한 김준완 교수, 이렇게 답한다: "당장 가서 환자 관장해, 이 새끼야. 네가 갖고 있는 모든 어휘력, IQ, EQ, 초능력 다 동원해서 환자 설득해서 관장해. 의사가 환자 포기하면, 그날로 의사는 끝이야."

    여차저차해서 환자를 설득해서 관장에 성공한 도재학 선생. 동료 전공의들이 의국에 와서, 그 진상(?) 환자 관장 했느냐고,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다. 잠시 침묵하던 도재학 선생 입에서 이런 답변이 나온다: "무릎 꿇고 빌었어. 관장 못하면 저 (병원에서) 짤리니까, 제발 관장 좀 하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하면서 무릎 꿇고 빌었어." 도재학 선생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지, 머리가 좋은 캐릭터는 아니다. 그래서 "뛰어나지 못하다"는 생각에 옅은 열등감을 상수로 안고 사는 캐릭터다.

    그렇게 위기가 넘어가고 얼마 후, 환자의 가족을 통해서 딸기 농장을 하는 환자의 메시지를 받는다. 딸기 패키지 틈새에 슬며시 끼워 놓은 쪽지 편지. 이렇게 써 있다: "저를 포기하지 않아 주어 고맙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도재학 선생. 이 편지를 쥐고 펑펑 울기 시작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환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작가의 따뜻한 시선 덕분에 환자의 마음도 자주, 많이 다루어지지만, 이 드라마는 어쨌든 의사가 주인공. 의사가 경험하고 느끼는 애환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이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환자의 시각에서 다시 조명해 본다면 어떨까.

    잠깐만. 여기에서 관장(灌腸)이란 무엇인가? "의학적 목적으로 항문을 통해 액체 약물을 대장 안으로 집어 넣어 대변을 빼내는 일"이다. 한 마디로 약물로 X을 억지로 빼내는 시술이다. 때로는 관장을 했는데도 나오지 않아서 의사나 간호사가 손가락으로 긁어내기도 한단다, 어머머... 그렇다. 결코, 우아한 행위라고 말할 수는, 살려고 선택하는 응급 조치에 해당하는 의학적 행위이다.

    당신이 몸이 아파 입원을 했는데, 정말 어쩔 수 없이 관장을 자주 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고 가정해 보자. 좀 더 세게, 상황이 위독해져서 매일 관장을 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의식은 또렷하다고 가정해 보자. (부디, 제발, 그럴 일은 없기를 바란다.) 이럴 땐 간호사 얼굴만 봐도 마음이 무너질 수 있다. 내 몸이 이런 상태라는 사실, 완쾌되기는 힘들어서 목숨을 이어가는 수준인데, 바로 그 알량한 목숨을 하루 더 이어가기 위해 X을 억지로 빼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한다면.

    당연히, "이제는 죽어도 관장은 싫어요. 어차피 죽을 목숨, 더는 관장 따위 하고 싶지 않아요. 너무... 수치스러워요" 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도재학 선생이 만난 6303호 환자가 그랬다. 관장을 하지 않으면 몸 속에서 연쇄적인 반응이 일어나서 생명이 위태로워지는데도 굳이 "관장을 안하겠다"고 버틴다. 이 환자의 주치의는 안그래도 까칠하고 권위적인 데다가 최근에 파혼 당해서 심기가 불편한 천명태 교수. "아, 싫으시면 그렇게 하세요" 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사실, 정말로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저 죽고 싶어요" 라고 말하지 않는다. 말 하기 전에 이미 혼자 외롭게 죽어 버린다. 고로 "저 죽고 싶어요" 라는 말은 "저 살고 싶어요" 라는 말이며, 더구나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가 의사에게 이런 말을 할 때에는, 필경 "선생님, 저 절대로 죽고 싶지 않아요.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저, 포기하기 말아 주세요" 라는 뜻일 것이다.

    의국에서 딸기 패키지를 앞에 두고 환자의 편지를 쥔 채 펑펑 울고 있는 도재학 선생. 어떤 감정일까?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서라도 살리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환자에 대한 고마움. 겉으로는 죽고 싶다고, 그냥 죽어 버리겠다고 공언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삶을 포기 하지 않은 환자에 대한 고마움. 무릎 한 번 꿇은 본인보다도 더 비루하고 참담하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버티고 있는 환자에 대한 고마움. 이런 고마운 마음이 가장 컸을 것 같다.  

    사랑하는 나의 동료들이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사회사업 현장에도, 율제 병원 도재학 선생이 느끼는 고마움과 비슷한 고마움을 진하게 전해주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지금 당장 죽어서 시체가 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치 않을 극심한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 "아주 죽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온 몸으로 버티고 서서 꿋꿋하게 비바람을 맞고 계신 분들.

    사랑하는 나의 동료들에게 경의를 바친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동료들이 만나고 있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감내하고 있는 분들께 경의를 바친다.

    이분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으시길, 
    끝끝내 버티셔서 넓은 꽃밭에서 편히 쉬시는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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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주거써, 나 말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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