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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세상 끝, 후앙코 (나의 까미노)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이재원의 여행기 모음 2020. 6. 11. 21:50728x90반응형
2014년 7월, 나는 죽기 위해서 세상 끝으로 날아갔다. 까미노 순례길(vo.la/DptI)을 조용히 걸으면서 내 삶을 정리하고, 마침내 세상(유라시아 대륙의) 끝이 나오면, 바다에 빠져 죽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살아서 돌아왔고, 여전히 살아 있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까닭은, 까미노 위에 남아 있다.
28일 동안 850km를 걸었던, 뜨거운 그 여름의 기록을 다시 정리한다. (2020년 6월 11일, 이재원 기록)
1. 까미노는 사람이다. (2014년 8월 24일, 이재원 기록)
(2) 나만의 세상 끝, 후앙코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첫째는, 세상끝 지점(Finisterre)까지 걸어가는 것이었고, 둘째는 마드리드나 바로셀로나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원래 나는 세상끝 지점까지 걸어갈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갑자기 선택했기에 사전 정보가 거의 없었고 시간도 딱 한 달밖에 없었다. 하지만 길을 걷는 동안 까미노 친구들에게 세상끝 지점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조금 빨리 도착하면 그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지런히 걸으면 단 하루라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다행히, 눈썹이 휘날리도록 걸은 덕분에 28일만에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허락된 귀한 3일. 나는 세상끝 지점을 갈지, 아니면 마드리드나 바로셀로나를 갈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만난 쾌남, 후앙코.
<산티아고에 함께 도착하다! 후앙코와 나>
후앙코는 자전거, 모터 싸이클, 트래킹, 암벽등반, 수영, 스킨스쿠버 다이빙 등 1인 스포츠는 모두 잘 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그는 최근에 헤어진 여자친구를 잊으려고 순례길을 찾았다고 했다. 쉽게 친해지려는 목적으로 내가 프로 축구, 레알 마드리드 이야기를 꺼내자 정색을 하면서 자신은 프로축구를 싫어한다고 했다. 왜? 지금 스페인은 경제 위기 때문에 모두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단지 쇼에 불과한 축구에 너무 많은 돈이 몰려드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단다. '어~ 이 청년 생각 한 번 건실하네?’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함께 걷게 된 후앙코는, 특유의 밝고 건강한 웃음으로 우리 일행을 끊임없이 즐겁게 해 주었다. 예쁜 여성이 지나가면 심장이 뛴다며 드럼을 치는 흉내를 내며 웃었고, 며칠 전 길 위에서 너무 매력적인 여성을 만났다며 페이스북으로 메시지가 왔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나는 조금씩 그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마침 그가 마드리드에 살고 있다고 하여,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후앙코,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내가 마드리드에 갈 수도 있는데, 거기 비싸잖아. 좀 싸고 좋은 숙소 어디 없을까?” 그랬더니 후앙코 왈, "리, 그러지 말고 그냥 우리 집에서 있어. 내가 시내 구경도 시켜줄게.” "우와! 정말?” "정말이지~ 내가 또 마드리드 토박이잖아. 지금은 조금 외곽에 살고 있지만. 그냥 우리 집으로 와. 전화번호 알려 줄테니, 마드리드 와서 전화 해.”
할. 렐. 루. 야. 이런 횡재가! 하지만 나는 고민을 했다. 내가 언제 또 스페인에 와 보겠냐고, 내가 언제 산티아고에 다시 올 것이며, 무엇보다도 언제 세상끝 지점까지 걸어가 보겠냐고. 만 하루를 고민한 끝내 내가 내린 결론은, 마드리드 행. 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까미노에 와서 내가 깨달은 것은, 까미노 길은 물리적인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나에게는 후앙코가 세상의 끝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게 된 마드리드. 나는 장장 시간 동안 버스르 타고 마드리드로 향했고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후앙코를 만나 그의 차를 탔다. 우리는 시내를 관통하여 시 외각으로 한동안을 달리다가 조용한 주택가, Las Rozas로 접어들었다. 그는 작은 외부 정원이 있는 나즈막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후앙코가 내게 물었다. "리, 마드리드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 "음… 사실, 좀 생각해 둔 게 있어. 나는… 관광객들이 모두 가는 곳 말고 뭔가 특별한 곳에 가 보고 싶거든. 그래서 내가 마드리드에 가면 하고 싶은 7가지 일을 미리 적어 뒀지.” "그래? 재미있다. 어디 보여줘 봐.” "하하… 리, 재미있겠다. 내일 나랑 다니면서 이거 다 해 보자.”
<마드리드에서 하고 싶은 일 7가지>
1. 한국 음식점 가서 매운 음식 먹기.
2. 마드리드 메트로 타 보기.
3. 아름다운 공원 걷기.
4. 후앙코의 추억이 서려 있는 장소 가기.
5. 기념 병따개 사기. (나는 세계의 병따개를 모으고 있음)
6. 윈드 자켓 사기.
7. 스페인 판 PLAYBOY 사기.
<후앙코와 나>
<후앙코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숲속, 거대한 바위 위에서>
다음날 아침부터, 우리는 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돌아다녔다. 우선, 후앙코가 세컨 잡으로 일하고 있는 스포츠 용품 전문 매장으로 갔다. (후앙코의 직업은 원래 스포츠 강사였다. 하지만 경제 위기 때문에 세컨 잡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일주일에 두 번씩 스포츠 전문 매장에서 물건을 판다고 했다.) 그곳은 창고형 할인 매장으로 질 좋고 값싼 물건이 많았다. 후앙코의 소개를 따라 윈드 자켓과 스포츠 바지, 스포츠 티셔츠, 샌들을 샀다.
다음으로 우리는 PLAYBOY 잡지를 사러 갔다. PLAYBOY… 왜? 난 한 번도 PLAYBOY를 산 본 적이 없었다. 그냥 한 번도 안 해 본 행동을 하고 싶었고 뭔가 상징처럼 PLAYBOY를 사 보고 싶었다. 후앙코가 주유소에 딸린 편의점에 팔 것 같다고 하여 동네 주유소를 찼았다. 하지만 없었다… 그래서 가게 된 에로틱 상점. 온갖 기괴한(?) 물건들이 뻔뻔하게 전시되어 있는 곳. 하지만 거기에도 PLAYBOY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상점을 나오려던 중, 뭔가(?)에 관심이 생겨서 그걸 하나 샀다. 후앙코가 상점 여주인에게 요즘 뭐가 잘 나가냐고 대신 물어 주었고, 나는 그 옆에서 얼굴을 붉히며 웃고만 있었다. 어쨌든 성공! (걱정 마시라, 대단한 것은 아니니.)
<부엔 레띠노 공원>
<부엔 레띠노 공원,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마음이 평화로운 스포츠맨, 후앙코>
이런 식으로, 후앙코는 나의 7가지 계획을 모두 이루어 주었다. 우리가 방문한 곳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곤 곳이, 부엔 레띠로 공원이었다. 필리페 2세가 별궁으로 만들었다는 이곳이, 지금은 마드리드 시민들이 언제나 방문해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숲처럼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드넓은 공원을 한가롭게 거닐다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를 만나게 되었다. 하프와 바이올린으로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던 그들은, 나를 보더니 '한국 피아니스트, 이루마’를 안다면서 '나를 위해서’ 그의 음악 한 곡을 들여 주었다.
와우! 너무 아름다웠다! 뭐랄까… 이번 여행에서 스페인이 나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 같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하여 생장과 부르고스, 레온을 거쳐, 산티아고에 도착했던 나, 꿈에도 그리던 세상 끝을 포기하고 까미노 친구를 따라서 마드리드에 왔다.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맞이한 마지막 시간. 세상의 그 어떤 달콤한 초콜릿보다도 달콤한 음악이 내 지친 몸과 마음을 자연스럽게 정화시켜 주었다.
<이루마의 음악을 연주해 준 거리의 악사들>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날, 저녁. 후앙코와 나는 야외 음식점에 앉아서 우리의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그 먼 길을 걸었던 건지, 이제 마지막에 이르러 생각과 감정이 어떤지,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후앙코, 나는 꼭 세상 끝까지 가고 싶었어.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 나는 무엇을 보게 될까? 무척 궁금했지. 하지만 길을 걸으면서 나는 깨달았어. 산티아고도, 세상 끝도,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건 그냥 지명이고, 장소일 뿐이야. 우리가 걸었던 순례길은 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관계였어. 나는 세상끝을 가지 않았지만 여기 마드리드에서 세상 끝을 보았다고 생각해. 후앙코, 네가 바로 내 세상 끝이야. ”
<나만의 세상 끝, 후앙코>
나는 나만의 세상 끝, 후앙코에 이르러, 850km 순례길을 걸으면서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고 얻은 것들을 모두 벗고 작은 모닥불에 그것들을 태웠다. 모두 연기처럼 사라지고, 나만 남았다.
행복한 나.
"다 주거써, 나 말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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