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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운 맛에 대한 그 처절한 땡김 (나의 까미노)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이재원의 여행기 모음 2020. 6. 13.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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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7월, 나는 죽기 위해서 세상 끝으로 날아갔다. 까미노 순례길(vo.la/DptI)을 조용히 걸으면서 내 삶을 정리하고, 마침내 세상(유라시아 대륙의) 끝이 나오면, 바다에 빠져 죽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살아서 돌아왔고, 여전히 살아 있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까닭은, 까미노 위에 남아 있다. 

     

    28일 동안 850km를 걸었던, 뜨거운 그 여름의 기록을 다시 정리한다.  (2020년 6월 11일, 이재원 기록) 


    나의 까미노.

     

    3. 매운 맛에 대한 그 처절한 땡김 (2014년 8월 29일, 이재원 기록)

     

    까미노를 걷기 시작한지 딱 3일만에 알았다. 뙤약볕 아래에서 험한 산길을 걷는 것보다, 엄청난 화력을 가진 스페인 모기에 물리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음식 문제라는 사실을. 으… 아침부터 빵, 점심에도 빵, 저녁에도 빵… 빵, 빵, 빵.. 이 노무 빵 때문에 내 마음은 뻥~ 뚫려 버렸고, 머리는 멍~해졌다.

     

    마크: "스페인 음식 어때? 맛있지”

    나: "아니. 별로. 솔직히 말하자면, 죽을 맛이야. 나, 한국에 있을 때는 이런 거 입에 대지도 않았어. 빵, 버터, 치즈… 그런데 여기에서 매 끼니마다 먹으려니 아주 주까따… 게다가 음식이 너무 기름져. 빵만 해도 힘든데, 기름까지 발라 먹다니… 그걸 느끼해서 어떻게 먹니?”

    마크: "헐… 그래? 정말 힘들겠다. 난 아주 맛있는데...” (불쌍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표정)

     

    진짜 그랬다. 스스로도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한 두 번이야 어떻게 먹겠는데, 매일 먹으려다 보니 뭐라고 설명하기도 힘든 오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일반적으로 까미노에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음식을 해결한다. 첫번째는 알베르게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순례자 메뉴를 찾아서 사먹는 방법이다. 크레덴셜을 내 보이면 먹을 수 있는(하지만 보통은 내가 순례자라는 게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에 확인하지는 않는다) 순례자 메뉴는 값은 싸고, 양은 많다. 순례자 메뉴의 가격은 대부분 9~10유로이고(비순례자 메뉴는 1.5배에서 2배 정도 비쌈) 전채, 메인, 후식 이렇게 세 가지 메뉴가 합쳐진 형태이기 때문에 허기를 달래는 정도가 아니라 다 먹으면 정말 배가 불러 온다. 보통 전채는 샐러드나 스파게티가 많고, 메인 요리는 닭고기, 돼지고기 같은 고기류나 생선요리이며, 후식은 아이스크림이나 케잌 종류가 많다. 식당 운이 좋으면 맛까지 일품이다.

     

    두번째 방법은, 직접 만들어 먹는 방법이다. 큰 도시에서는 거대한 슈퍼마켓이 있어서 온갖 재료를 다 살 수가 있고, 아주 작은 마을이라도 대개는 작은 식료품점은 있기 때문에 재료를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산골 마을 같은 곳에는 이렇게 작은 식료품점마저도 없을 때가 있다. 이런 곳에서는 사 먹는 수밖에 없다.) 여러 사람이 함께 돈을 모아서 재료를 산다면 식사 비용은 3~4유로까지도 낮아진다. 사 먹는 비용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요리는 알베르게의 주방에서 한다(주방이 없는 알베르게도 있음). 주방에는 여러 가지 식기와 올리브유 같은 기본적인 재료가 비치되어 있어서 식재료만 사면 요리를 하는데 크게 불편함은 없다. 각종 재료를 다듬고 전기형 렌지에 올려 요리를 한다.

     

     

    <사하군 무니시팔에 있는 주방 모습>

     

    까미노 초반기에 나는 요리를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일행이었던 귄터 아저씨는 그냥 싼 순례자 메뉴를 찾아서 사 먹는 것을 즐겼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아저씨를 따라 다녔다. 그런데 점점 갈수록 비용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 이래서 직접 요리를 해 먹는거구나‘ 싶었다. 하지만 직접 요리를 해 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귀찮기도 했고, 내가 무슨 요리를 하겠어,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스페인 요리에 지쳐갔다…

     

    그러던 중,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느날 까미노를 걷고 있던 중, 한국인 청년 두 명이 보였다. 어떻게 알아 봤느냐고? 쉽다. 일단, 까미노에서 만나는 동양 사람들은 태반이 한국 사람이다. 공식 통계에서도 한국 사람이 스페인 사람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보통 트레킹에 적합한 옷을 갖추어 입고 온다. 형형색색의 아웃도어 복장을 입고 있어서 그냥 집에서 입던 거 걸치고 나온 듯한 외국 사람들과 좀 다르다. 그리고 가끔씩 배낭에 보이는 선명한 태극기. 어쨌든, 그들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직감했을 때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옆까지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딱 보니까, 한국 사람이네!”

     

    두 사람은 놀랐다. 얼굴을 보니 전에도 여러 번 만났던 친구들이다. 심지어 론세스바예스에서는 같은 칸에서 잠을 잤던 것도 같다.

     

    "한국분이세요?"”

    "네"

    “깜짝 놀랐네요.”

     

    이렇게 시작된 대화. 나로서는 까미노에 온 지 10일 만에 공식적으로 사용한 한국어였다. 한국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금방 눈치 챘지만, 뭔가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 이역만리 까미노까지 왔는데 한국 사람들을 찾아다니거나 한국어를 쓰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사실 의도적으로 한국 사람들을 피했다. 하지만 뭐랄까…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움부터 시작해서… 그냥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이 그리웠던 것 같다.

     

    "대학생이죠? 어려 보여서.”

    "네, 학교 선후배 사이예요.”

    "뭐 전공해요?”

    "요리요.”

     

    뭐? 뭐? 뭐? 요리라고라고라?

     

    할! 렐! 루! 야!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빵, 빵, 빵으로 지친 제 몸에 단비를 뿌려 주시려고 이렇게 귀인들을 보내 주셨군요! 이젠 됐다! 드디어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어!’ 이혜성, 김철호. 나는 이 귀인들에게 결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나에게 시련은 계속 되었으니… 마침 그 즈음의 코스에서는 알베르게에 주방이 없었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하느님~ 왜 이러세요? 요리사를 보내 주셨으면, 음식도 보내 주셔야죠! 이런 마음으로 매 시간을 버티다가 도착한 사하군. 사하군은 까미노의 딱 절반 지점이다. 그곳의 무니시팔(공립 알베르게)에는 작지만 어엿한 주방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여태껏 먹어본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는 고기 요리와 오뎅국, 그리고 야채볶음을 맛보게 되었다. 그리고 쌀밥… 특별히, 이날 먹었던 오뎅국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스페인에는 당연히 오뎅이 없다. 하지만 이 친구들은 슈퍼마켓에서 파는 스페인 스프 소스로 정말 딱 오뎅국 맛을 만들어 냈다. 추운 겨울철, 지하철 역 앞에서 옷깃을 여미며 먹던 그 맛, 뼈속까지 뜨끈하게 덥혀 주던 오뎅국 맛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 주신 요리사, 좌측이 이혜성씨 우측이 김철호씨>

     

     

    <혜성씨와 철호씨가 만든 최고의 요리,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맛!>

     

     

    한편, 나의 까미노 여정 중에서 음식과 관련하여 잊지 못할 곳이 세 곳 더 있다. 부르고스와 레온, 그리고 산티아고.

     

    부르고스에서는 제대로 끓인 신라면을 맛보았다. 스웨덴 친구였던 토비와 부르고스 시내를 자유롭게 부유하던 나는 토비에게 물었다. "토비야, 나 한국 음식 먹으러 갈 건데, 혹시 함께 갈래?” "여기 한국 음식점이 있어?” "아니, 스페인 음식점인데 한국 라면을 먹을 수 있대서.” "좋아, 가자.” "근데, 한국 음식, 특히 라면은 좀 맵거든. 괜찮겠니?” "응. 나 가리는 거 없이 잘 먹어.”

     

    그래서 가게 된 부르고스의 스페인 레스토랑. 진짜 라면이 메뉴에 있었다. 김치는 없었지만, 제대로 끓인 신라면에 공기밥도 나왔다. 나는 감격해서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라면을 그야말로 폭풍 흡입했다. 어라? 토비 이 녀석도 라면을 잘 먹네? 그랬다. 토비는 나만큼이나 라면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알려준 대로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서 다 먹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너무 기특해서 에라~ 기분이닷, 내가 음식값을 치뤄주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던 토비는 내가 밥을 사는 게 이상했을 테지만, 토비야~ 너는 내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이 스페인 땅에서 매운 라면을 먹는 기분을.

     

    레온에서는 초밥을 먹었다. 그랬다. 레온은 대도시였고 혹시나 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일식집이 있었다. 만세! 나는 일행과 함께 산 넘고 물 건너는 심정으로 레온을 찾아다닌 끝에 일식집을 찾아냈고 이날도 역시 폭풍 흡입을 했다. 비록 그 일식집은 테이크 아웃을 주로 하는 간이 음식점이었고, 요리사도 웬 스페인 여성, 게다가 요리 방식도 아주 인스턴트식이었지만, 스페인에서 초밥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중요했다.

     

    마지막으로, 산티아고에서 먹었던 라면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순례자 사무실에 들러서 증명서를 받은 나는 정말 기뻤다. 한껏 흥이 오른 나는 까미노 친구들과 뭔가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싶었다. 마침 내 옆에는 마크와 루씨 아줌마, 그리고 바스크 지방에서 온 젊은 친구, 이니고와 마리아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내 스마트 폰에는 순례자 사무실 게시판 한 켠에 게시되어 있던 한국 민박집의 홍보 문구, 라면을 먹고 싶은 사람은 오라는 홍보 문구와 약도가 찍혀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 게시판 구석에 붙어 있던 홍보지>

     

     

    "여보게들, 내가 지금 한국 라면을 먹으러 가려고 하는데 갈텐가?”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다들 가자고 해서 약간 놀랐다. 그렇게 가게 된 한국 민박집. 친구들이 너무 재미있어 했다. 내가 한국 음식을 먹으러 간다고 해서 레스토랑을 기대했는데, 무슨 빌딩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니 너무 재미있다는 거였다.

     

    <외국인 친구들이 너무 재미있어했던 민박집 초인종>

     

     

    "누구세요?”

    "네, 라면 좀 먹으러 왔습니다.”

    "올라 오세요.”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까지 올라가서 민박집 문을 여는 순간, 민박집 여주인으로 보이는 분이 굉장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민박집에 외국인이 라면을 먹으러 온 게 처음이었다고 한다. 맵디 매운 라면을 외국인들이 먹겠다고 찾아왔으니 당황할 수밖에. 어쨌든 그 민박집 주방에 가서 라면을 주문하고 기다렸다.

     

    5분쯤 지났을까, 라면과 공기밥, 그리고 김치(!)가 나왔다. 나는 눈을 감고 매운 맛의 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뜨거운 경배를 바치고는, 젓가락으로 라면을 들어 입에 넣었다. 후루룩 짭짭… 후루룩 짭짭… 경건한 마음으로 한참을 먹고 있는데, 마크가 쩔쩔 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 오! 루씨 아줌마는 라면을 아주 잘 드시고 계셨고, 이니고와 마리아도 ‘한국 식으로’ 아주 잘 먹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마크는… "리! 이건 매워도 너무 맵잖아. 아무래도 스페인 음식에 대해서 네가 복수하는 것 같다!” 라고 말하면서 연신 물을 들이켰다.

     

    결국, 나는 마크가 먹다 남긴 라면을 대신 먹었고 나머지 멤버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라면을 남김 없이 다 먹어치웠다. 루씨 아줌마는 제일 먼저 다 먹었다고, 자신이 챔피언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고, 이니고와 마리아도 맵긴 했지만 아주 맛있었다고 말했으며, 마크도 '조금 힘들긴 했지만 맛있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글쎄… 내 생각엔 이 사람들, 너무 친절한 사람들이라서 어느 정도는 나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다 먹은 것 같다. 하지만 맛이 아예 없었다면 그렇게 다 먹지는 못했으리라…

     

     

    <그날의 멤버: 오른쪽부터 마크, 이니고, 마리아, 루씨 아줌마, 그리고 나!>

     

    역시, 음식은 한 지방이나 한 나라의 문화를 대표하는 영역인 것 같다. 음식에는 어렸을 때부터 쌓인 수많은 기억이 스며들어 있고 그 기억과 함께 느낌과 온갖 정서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까미노 위에서 한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을 때가 한국음식이 먹고 싶을 때부터였다. 무엇보다도 매운 맛.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나였지만,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매운 음식이었던 것이 신기했다.


    핏줄이 땡기듯, 매운 맛이 내 존재를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다 주거써, 나 말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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