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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듯한 여자'입니다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4. 6. 13. 06:24728x90반응형
나는 ‘반듯한 여자’입니다
글쓴이: 김정현 (안동성좌원 요양복지과 팀장, 2024)
첨삭 지도: 이재원 (강점관점실천연구소, 2024)
출근날보다 일찍 일어나 씻고 신경 써서 단장한다. 검은 상의를 찾아 입고 길을 나선다. 오늘 안동컨벤션센터에서 “경북농아인의 날 기념식”이 열린다. 나는 영상기기 부스와 의료 부스에서 수어통역 봉사자 임무를 받았다. 한동안 수어를 쓰지 않았는데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반 기대반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며 농아인협회와 맺은 인연을 되짚어 본다.
안동에 이사 온 후 협회에서 일하는 지인이 부탁해서 회원들에게 취미반 강좌로 “POP 예쁜 손글씨”를 가르쳤다. 나는 수어를 전혀 몰랐지만 손글씨는 그대로 보고 따라 쓰면 되니 농인들에게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사각 매직펜을 들고 내가 먼저 선을 그어 시범을 보이면 수강생들이 따라 썼다. 직선쓰기가 끝나고 나서 자음과 모음, 단어쓰기를 하면서 순조롭게 한 달 반이 지나갔다. 어느덧 붓으로 쓰는 중급 단계가 되자 수업만 들어서는 학생들 실력이 잘 늘지 않았다. 4절 쓰케치북 한바닥 분량에 붓으로 직선을 그어오라고 숙제를 내드렸다. 모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1주일 후 수업 시간에 숙제를 확인했다. 앞뒤 빼곡히 쓴 사람, 직선긋기인데 자음을 써 온 사람, 매직펜으로 한 바닥 써 온 사람 등등 수강생 다섯명 중에 어느 누구도 과제를 정확히 수행하지 못했다. 이상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다음에 또 그 다음에도 숙제를 드리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말과 다른 숙제를 내어밀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나는 여러 번 반복해서 숙제를 설명했고 이분들은 분명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정말 내 말을 이해했나? 그걸 어떻게 확인하지? 혹시 내가 수화를 모른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기로 했나?’
내가 모르게 손짓하며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사람들 앞에서 뭐라 할 말이 없어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 수화통역사 선생님들은 바쁘게 출장 다니시느라 자주 사무실을 비우셔서 매번 통역해 달라 부탁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내 수업이니 먼저 내 힘으로 해결해 보고 싶었다.
수강생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K씨가 내 입모양과 글씨를 어느 정도 읽고 쓸 수 있었다. 그분에게 천천히 말하고 이해한 내용을 간단하게 글로 써 보라고 요청했다. 내용이 내 말과 맞으면 다른 수강생에게 수화로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K씨의 수화를 본 수강생들은 금새 얼굴이 환해지며 크게 끄덕였다. 게다가 손으로 OK싸인까지!
나는 열심히 설명했는데 당신들이 이해를 못하면 어떡하냐고 생각했는데, 농문화를 알지 못한 채 단순히 그리고 쓰는 수업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많이 오만했다. 농인 사회에 들어왔으면서 그들의 문화와 의사소통 수단을 배우려 하지 않다니. 몹시 부끄러웠다.
그후 나는 수화기초반 수업에 등록했다. 수업에 필요한 수어를 조금씩 배우면서 우리는 음성언어, 수화, 입 모양, 문자, 손발짓, 얼굴 표정 등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 서로 의사를 확인하며 마지막 회차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수어로 장난까지 치면서. 수업 시간 내내 글씨를 반듯하게 각지게 쓰라고 잔소리를 해서, 학생들이 내 얼굴이름(농인들이 본이름 대신 얼굴특징으로 지은 이름. 시간이 절약되고 기억하기 쉽다)을 “반듯한 여자(또는 각진 여자)”라고 지어 주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데, 네비게이션이 목적지 근처에 왔다고 알려준다. 커브길을 돌자 행사장이 보인다. 검은 정장을 입은 협회직원들이 무전기를 들고 분주히 움직인다. 차에서 내리자 안동지회 회원들이 손을 흔들며 “반듯한 여자, 오랜만이야!”, “반듯한 여자 잘 지냈어?”하고 수어로 반겨준다. 수어가 기억 안날까봐 살짝 걱정했지만, 낯익은 얼굴을 보니 수어가 생생하게 기억나 자연스럽게 두 손을 들어 나풀나풀 허공에 말을 쏟아낸다.
“곱슬머리씨, 다크써클씨, 코큰남자씨, 코밑에 점씨, 모두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만나니 참 반갑습니다!”
<안내>
_ 본 글은 직접 글을 쓰신 김정현 팀장님께 공식적으로 사용 허락을 받았습니다. (교육 및 출판 목적)
_ 김정현 팀장님께서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글쓰기 클래스 심화반 '글로위로'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이재원 선생 피드백>
1. 이번에도 딱 김정현답게 쓰셨네요. 소재도 좋고, 주제도 좋고, 문장도 좋고, 연결성도 좋습니다. 나무랄 데가 없이 잘 쓰셨어요. 특히, 김정현 선생님 개성이 잘 묻어나서 좋습니다. 잘 쓰셨습니다.
2. 수어통역사가 되신 사연을 쓰셨습니다. 어? 그런데 저 같은 (수어) 문외한이 읽으면, 수어통역사가 되는 과정이 쉽게 느껴지네요. 아니잖아요? 그냥 설렁설렁해서 수어통역사가 될 수 없잖아요? 이 글에는 자세하게 쓰지 않으셨지만, 미친듯이 노력해도 될 둥 말 둥 아닙니까?3. 일반적으로 '언어'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하늘에 닿으면 언어가 생겨나죠. 그리고 '소통'하고 싶은 마음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지요.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강의/자문/상담 문의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010-8773-3989 / jaewonrhie@gmail.com)'지식 공유하기(기타) > 글쓰기 공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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