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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과 화해한 날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4. 6. 11. 07:03728x90반응형
당근과 화해한 날
글쓴이: 신선미 (성산종합사회복지관 과장, 2024)
첨삭 지도: 이재원 (강점관점실천연구소, 2024)
누리 엄마(나): “누리야, 누리는 이렇게 당근을 잘 먹을 수 있어? 진짜 대단하다.”
둘째 아들: “나 당근 맛있는데. 몸에도 좋잖아.”
나는 속으로 ‘그래. 나 대신 너라도 많이 먹어라’라고 생각했다. 일곱 살 아들은 외모, 성격, 체형, 그리고 입맛까지도 99% 나를 쏙 빼 닮았지만 당근을 잘 먹는다. 어떻게 당근을 아무렇지 않게 잘 먹을 수가 있지? 늘 신기했다.
사실, 나는 35년 간 당근을 먹지 못했다. 당근을 생각하면 달큰한 향 때문에 구역질이 났다. 당근마켓 이름만 들어도 멀미가 나서 중고나라를 고집했고, 어린 아이들이 토끼한테 당근을 먹이로 주는 모습을 보면 ‘저 당근 먹고 토끼가 토하면 어쩌지? 이건 토끼 학대야’ 라고 엉뚱하게 생각했다.
여섯 살 즈음에 엄마가 해주신 떡볶이에 들어있던 설익은 당근을 먹고 나서 속이 니글거렸지만 남기면 안 될 같아서 억지로 먹었다가 다 쏟아냈다. 어린 기억에 이 정도면 병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안 좋은 경험이었으니 당근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생 당근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볶은 당근은 그나마 좀 낫지만 많이 먹을 순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내가 싱싱하고 탐스러운 당근을 뽑고 너무나 기뻐했다. 밭에 심은 당근을 한 번도 못 봤지만 초록색 잎사귀만 보고도 당근인 줄 알았고 참 싱싱하고 예뻐서 잊을 수 없었다. 사실 이 꿈은 태몽이었다. 결혼 4년 만에 얻은 첫째 아이 태몽이 하필이면 당근 꿈이었다. 아들인데 고추 대신 당근이었나 보다. 그 후로 당근이 조금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당근을 즐겨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기회가 닿아서 우리 아파트에서 요리 솜씨가 좋기로 소문난 시후 엄마가 만든 당근 라페 샌드위치를 맛보았다. 당근 라페는 당근을 싫어하는 사람도 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용기내어 먹었는데 와! 어떻게 당근향이 전혀 안 나면서도 이렇게나 아삭하고 맛있을 수가 있는지! 나는 그 자리에서 하늘을 보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리고 그날부터 당근에 얽힌 안 좋은 기억이 조금씩 지워졌다.
이제는 나도 당근을 소금에 절여 물기를 쫙 빼고 올리브유, 레몬즙과 홀그레인 머스타드로 맛을 낸 당근 라페를 만들어 먹는다. 당근 라페를 한 입 씹으면 오독오독한 당근 식감과 고급스러운 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입 안을 흐뭇하게 채운다. 당근을 맛나게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친정엄마와 남편이 놀라서 웬일이냐고 묻는다. 하긴, 그동안 이 맛도 모르고 당근을 평생 원수같이 35년간 미워했다니, 지난 세월이 어제 꾼 꿈 같다.
요즘 노안이 오려는지 눈이 어두운데 당근을 먹으면 좀 나아지겠지? 우리 아들과 아들 친구 시후 엄마 덕분에 당근과 화해할 수 있어서 참 고맙다.
<안내>
_ 본 글은 직접 글을 쓰신 신선미 과장님께 공식적으로 사용 허락을 받았습니다. (교육 및 출판 목적)
_ 신선미 과장님께서는 인천시사회복지사협회가 기획한 '성숙을 담는 글쓰기, 회전목마(제 2기)' 클래스에 참여하셨습니다.
_ 인천시사회복지사협회 김성준 회장님, 박정아 사무처장님, 차수현 주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재원 선생 피드백>
1. 우와! 저는, 평생 동안 '편식인(?)' 인권을 위해서 투쟁해 온 사람으로서, 이 글을 독립선언서 같은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네, 농담입니다.) 아이가 특정 음식을 먹지 않을 땐, '그럴 만한 좋은 이유'가 있답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어릴 때 발생하는데요, 아이는 어려서 본인 생각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니, 어른들은 아이가 꺼낸 이야기를 '그럴 만한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 사실, 평생 당근을 안 드신다고 해도, 저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는 ‘편식’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이젠 ‘스스로 선택’해서 안 드시니까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성숙해지시면서 마음이 열리고 자연스럽게 드시게 되었으니, 과정이 참 좋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아주 자연스럽게 글로 소화하셔서 더욱 좋습니다.
3. 무척 잘 쓰셨습니다. 아주 사소한 소재를 글감으로 잘 포착하셔서, 멋지게 글로 완성해 내셨습니다. 뭐랄까요, 신선미 선생님 글은 맑고 투명하며 소박해서, 아이 웃음처럼 귀엽습니다. 게다가 문장과 문장이 서로 잘 붙어서, 응집력도 단단하게 느껴집니다. 술술술 읽히고 슬슬슬 설득됩니다.
[신선미 작품] 꼬수운 냄새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강의/자문/상담 문의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010-8773-3989 / jaewonrhi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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