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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년 오늘, 나는 빠리에 있었다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이재원의 여행기 모음 2020. 7. 17.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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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7월 15일.

    나는 프랑스 빠리에 있었다. 

     

    빠리에 있는 한국인 민박집에서 새우잠을 자고, 

    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의 출발점인 생장,

    이라는 작은 마을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까. 

     

    진실로,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서 있었다.


     

    까미노에서 만난 예수. 

     

    순례길에서 맞이하는 일상은 단조롭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침낭부터 개고, 전날 펼쳐 놓았던 모든 짐을 다시 쌉니다.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게 만드는 폐를 끼치기 싫어서 얼른 신발 끈을 매고 동료들을 따라 나섭니다. 후래쉬에 의지하여 새벽 길을 걷다 보면 배가 고픕니다. 잠시 쉬면서 콜라와 빵으로 허기를 달래고 또 걷습니다. 걷고 걷고, 또 걷습니다. 다시 허기가 찾아올 때쯤, 즉 오후 1시쯤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목적지 마을에서는, 이미 녹초가 된 몸을 끌면서 알베르게(저렴한 순례자 전용 숙소)부터 찾습니다. 적당한 가격이면 체크인을 하고 크레덴셜(순례자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여권)에 오늘의 도장을 받은 후 허름한 이층 침대에 짐을 풉니다. 샤워부터 하는 사람도 있고, 빨래부터 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떤 이는 그냥 누워서 잠부터 자기도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낸 후 마을에 나가 수퍼마켓에서 음식 재료를 사서 저녁을 만들어 먹거나 식당의 순례자 메뉴를 사서 먹습니다. 그리고 10시쯤 잡니다. 

    다행히, 갈리시아 지방(스페인 북서부 지방)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날씨가 건조하기 때문에 따가운 햇빛이 내리쬐는 것에 비해서는 덜 덥습니다. 하지만 여름은 여름. 뙤약볕 밑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매일 30km씩 걷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지겹게 반복되는 산악 지역에서는요. 

    제가 루씨 아줌마의 모습을 다시 본 것이 바로 산악지역이었습니다. 12시가 넘은 시각, 빨리 목적지에 도달해서 짐을 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아픈 어깨와 고픈 배를 움켜쥐고 걷고 있었는데, 루씨 아줌마가 저에게 달려왔습니다. 영어로 물었죠. “Lucy, Where are you going?” 루씨 아줌마는 영어를 못했습니다. 스페인 태생의 스위스인으로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만 영어만 못했습니다. 루씨 아줌마는 바쁘다는 손짓만 하고 저를 지나쳐서 다시 어디론가 달려갔습니다. 저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걸었습니다. 

     

    루씨 아줌마가 길을 거슬러 달려갔던 이유를 그 다음날 알게 되었습니다. 루씨 아줌마와 함께 다니는 캐나다 퀘벡 청년, 마크-안드레가 말해 주었습니다. “아, 루씨는 누군가를 도우려고 그렇게 달려갔던 거야. 길에서 누군가 도움이 필요했거든.” 이때 제 마음에 작은 파장이 일었습니다. ‘그랬구나... 누군가를 도우려고.’ 

    며칠 후, 순례길이 1주일 정도 남았을 무렵, 저는 페이스를 높여서 좀 더 빨리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땅끝마을까지 걷어가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마침 제가 짐을 푼 알베르게에서 루씨 아줌마와 마크-안드레를 만나서, 다른 그룹보다 페이스가 빠른 그들에게 함께 가도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루씨 아줌마와 마크-안드레는 흔쾌히 승낙을 했고 그 다음 날부터 우리는 함께 걷게 되었습니다. 

    루씨와 마크-안드레는 매우 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끊임 없이 농담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웃겼고, 스스로도 크게 웃었습니다. 빠빠빠삐~ 마카로니~ 등등의 말도 안되는 이탈리아 말을 외치면서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왜 이리 오바를 할까? 생각도 했지만, 마냥 밝고 천진난만한 모습에 저도 서서히 동화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그 말도 안되는 이탈리아 말을 저도 함께 외치면서 걸었죠. 

    사실, 이 두 사람은 순례길 초반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루씨 아줌마는 첫인상이 별로였습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데다가 생김새도 강해 보였습니다. 마크-안드레는 몇 번 이야기를 해 보았지만 페이스가 달라 깊이 친해질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걷게 되면서 이들의 사연과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 

    59세의 루씨 아줌마는 스위스 자신의 집앞에서부터 2,000km가 넘는 길을 걸어왔다고 했습니다. 22세의 마크는 프랑스에서 시작해서 1,200km를 걸어왔다고 했습니다.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정말 먼 거리입니다. 솔직히, 맨정신으로는 걷기 힘든 거리입니다. 역시 사연이 있었습니다. 

    루씨 아줌마는 2년 전 남편을 잃었습니다. 부부 금슬이 좋았고 자식도 없었기 때문에 상실감이 컸습니다.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TV에서 까미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순례길에 왔다고 합니다. 부르고스에서부터 산티아고까지 500km를 걸으면서 아줌마는 우울증이 저절로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후 2년이 지났고 올해는 아예 집에서부터 산티아고까지 걸어오는 여행을 시작한 겁니다. 

    한편, 마크-안드레는 엄마가 알콜중독입니다. 그래서인지 마크는 그 맛있는 와인과 맥주를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와인의 땅이라고 불리며 와인 수도꼭지를 무료로 틀어놓은 곳에서도요. 마크는 일찍 독립했지만 가족의 문제가 계속 자신을 괴롭혔다고 했습니다. 특히 엄마의 알콜 문제는 너무 심각했다고 합니다. 마침 하던 일도 그만 두고 대학에 가게 되어 여러 가지 생각하고 싶어서 까미노에 왔다고 했습니다. 

    길 위에서 두 사람은 특별히 밝고 명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친절하고 배려심이 많았습니다. 마크-안드레도 친절했지만, 특별히 루씨 아줌마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수식어로 ‘대단하다’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실제 루씨 아줌마가 타인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즉각적인 작은 친절이 몸에 배어 있는 분이었습니다. 

    까미노를 걷다 보면,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납니다. 히피처럼 길에서 자고 길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고, 산중에 과일 몇 개 꺼내 놓고 노점상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산과 들에서 딴 산딸기와 앵두를 파는 할머니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이들을 보면서 재미있네, 하고 지나칩니다. 하지만 루씨 아줌마는 단 한 번도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잠시 멈춰서서 인사를 나누고 과일 하나라도 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는 마크-안드레와 저를 불러서 함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며칠을 다니면서 저는 루씨 아줌마가 정말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친절이 무엇인지, 배려가 무엇인지, 인사가 무엇인지, 루씨 아줌마를 통해서 다시 발견하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점을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루씨 아줌마가 천사라는 주장을 하려는 게 결코 아닙니다. 다만, 아주 작은 차이, 늘 사람들을 배려하고, 챙기고, 작지만 즉각적인 도움을 주려는 태도를 아줌마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지니고 있었습니다. 

    까미노를 걷다 보면, 매일 받는 단골 질문이 몇 개 있습니다. 첫째, ‘왜 까미노에 왜 이렇게 한국 사람이 많으냐?’ (진짜로 많습니다. 제가 걸었던 구간, 제가 걸었던 기간에는 한국 사람과 독일 사람이 제일 많았습니다.) 둘째, ‘북한에 가 봤느냐?’ 셋째, ‘너는 여기 왜 왔느냐?’ 첫번째 질문은 모른다고 답하거나 ‘무한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다’는 정도로 패스, 두번째 질문 역시 ‘가본 적 없다’라거나 ‘’정부의 특별허가 없이는 일반 주민들은 자유로운 왕래가 어렵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은 정면 질문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적당히 둘러대거나 답변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는 계속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여기에 왜 왔을까...?

    총체적인 위기였습니다. 관계에서도, 일에서도, 기본적인 자존감에서도... 계속되는 불면증과 우울감 때문에 그대로 있다가는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까미노 행을 갑자기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 폐부를 깊이 찌른 전 직장 상사의 말. “재원씨는 도대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아니라고 해도 할 수 없어요. 이 일(즉, 사회복지사 일, 남을 돕는 일) 말고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어때요? 재원씨는 사회복지 일에 잘 안맞는 거 같아요.” 그는 저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심한 말을 한 거고, 저는 무시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선 ‘저 말이 맞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서웠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외롭게 걸으면서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될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정말 아무하고도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고, 특히 한국 사람들하고는 눈도 마주치기 싫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죄가 없지만, 한국 사람은 한국의 답답한 부분을 상기시켜서 몸서리치게 싫었습니다. 혐오스러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길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제 마음 문이 열렸습니다. 처음 10일을 함께 걸었던 독일인 할아버지 귄터 씨는 늘 아침을 먹고 7시에 출발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6시에는 출발을 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걸음이 무척 빨랐습니다. 보통 한 시간에 3~4km를 걷는데 우리는 한 시간에 5~6km를 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날의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보다 앞서서 출발한 사람들을 모두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람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네이티브 영어권 사람이나 영어를 아주 잘하는 스칸디나비아 사람들 외에는, 제 중학생 스피킹 실력으로도 충분히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까미노에서 나누는 대화란 대개 간단한 것이거든요. “너 어디에서 왔니?”, “까미노에는 왜 왔니?”, “무슨 일하면서 사니?”, “어디에서 출발했니?”, “오늘은 어디까지 갈거니?”, “다리 상태는 괜찮니?” 뭐, 대개 이런 질문입니다. 그러니 영어를 아주 잘하지 않아도 충분히 대화를 할 수가 있었죠. 

    어쨌든, 저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길 위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했습니다. 정말 쉬지 않고 대화를 했습니다. 어떤 때는 앞에 걸어가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몇 백 미터를 뛰어가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저를 두고 까미노에서 만난 어떤 네덜란드 순례자는 제 까미노 친구인 귄터 씨에게 “저 한국 녀석은 너무 말이 많아서 싫어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대화가 즐거웠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너무 좋았습니다. 

    독일에서 변호사를 하다가 작가가 너무 되고 싶어서 1년 동안 술을 매일같이 퍼 마시며 고민을 하다가 과감하게 넥타이를 풀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게 된 카림. 그는 중동계 혼혈 독일인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자신은 독일인이지만 국적이 없는 자유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안에는 괴물이 산다. 나찌나 일본 제국주의는 사실,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이 괴물을 잘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보살피는 것이 성숙한 민주주의고, 성숙한 개인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영어 교사를 하는 매리언은 저와 좋아하는 영화나 미국 드라마 취향이 비슷했습니다. 특히, 미국 드라마 중에서도 남들은 잘 안 보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게 너무 비슷했습니다. 우리는 한참을 신나게 떠들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드라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끔씩 길을 잃을 정도로 신나게 말입니다. 하지만 매리언은 아주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매리언은 제가 좋아하는 책, 수전 케인이 쓴 ‘콰이어트’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자신은 사람들 속에서 즐겁게 지내지만 반드시 혼자서 지내야 하는 시간이 일정하게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니고와 마리아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 사는 젊은 영화광이었습니다. 와우! 제가 영화광이거든요. 우리는 영화 이야기로 침을 튀기며 정신 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바스크의 고유한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스페인은 지방주의가 강한데 특별히, 바스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독특하다고 분명한 정체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분리 독립을 위한 테러를 할 정도로요. 하지만 이니고와 마리아는 스페인에서 사는 게 좋다면서 완벽한 독립은 어려우면서도 위험한 일이라면서 어른들이 현명하게 생각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요. 그러다가 야구 경기의 끝내기 안타처럼 저에게 다가온 사람들이 루씨와 마크-안드레였습니다. 실제로는 제가 먼저 다가갔지만 저는 결국 그들이 제게 다가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가 얻게 된 것은, 저에 대한 ‘수용’이었습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친절’이었고요.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저는 사랑을 너무 멀리 있고, 너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루씨 아줌마나 마크-안드레는 제 앞에서 너무나 밝고, 기쁘고, 쉽고, 재미있게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루씨 아줌마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라잇?’ 하며 어색하지만 따스한 영어 발음으로 저에게 안부를 물었고, 제가 선물로 드린 나무 십자가를 가슴에 갖다 대면서 저를 보고 고맙다는 표정을 짓곤 했습니다. 마크-안드레는 귀찮을 법도 한데, 늘 루씨 아줌마와 프랑스어로 나눈 대화를 통역해 주었고, 제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개인적인 이야기라며 통역하지 않겠다고 늘 말해 주었습니다. 오,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닌 이런 친절과 배려가 저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왔고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루씨 아줌마와 함께 다닌 지 3일째 되던 날 이른 아침, 저는 카페에서 우리가 먹은 음식의 접시와 음료 캔을 주인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음식을 내오고 찌거기와 그릇을 챙기는 일은 무릇 식당 주인이나 종업원의 일입니다. 하지만 루씨 아줌마는 늘 우리가 먹은 음식을 자신이 거둬서 카운터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늘 따뜻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라시아스, 아디오스” 라고요. 카페를 나서려다 보니 제가 저도 모르게 루씨 아줌마를 따라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씨 아줌마의 친절을 저도 베풀었던 겁니다. 

    그리고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2일 전, 어느 알베르게에 묵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곳에서 일주일 만에 한나라는 독일인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나는 17세의 똘똘한 청소년으로 레온에서부터 걷다가 물집이 심해져서 버스를 타고 그날도 5킬로밖에는 못 걸었다고 말했습니다. 한나는 집과 부모님이 그립다면서 울먹였습니다. 저는 등을 두드려주며 말없이 위로했습니다. 이것만으로는 모자란 느낌이 들어서 제가 챙겨온 포비돈(소독약)과 연고, 밴드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늘 즐거운 루씨 아줌마와 마크-안드레와의 저녁 식사에 초청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주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냈죠. 어느새 한나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날 역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제가 저도 모르게 루씨 아줌마를 따라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씨 아줌마의 위로를 저도 한나에게 베풀었던 겁니다. 

    길을 걸으면서 제가 가지고 있던 화두는, ‘나란 인간은 도대체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 였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절망해서 까미노 길에 갔던 거였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제가 타인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즐겁고, 기쁘게, 더구나 사람들 속에서 말입니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던 날, 저는 갈리시아 맥주 캔을 하나 사서 대성당 앞에서 제 머리에 뿌렸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는 루씨 아줌마, 마크-안드레와 함께 순례자 사무실에 가서 증명서를 발급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긴 줄의 중간에 서서 저는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감동을 받아서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루씨와 마크-안드레가 놀라서 저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가 한 말은, “You moved me.” 였습니다. 

     

    (성공회) 신부님께 간증을 부탁 받고 글을 썼지만, 제가 생각해도 이상한 글입니다. 종교적인 내용이 아닌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아니, 확신합니다. 루씨 아줌마와 마크-안드레, 그리고 제가 까미노 위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제가 사실은 아주 여러 번 예수를 만났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사랑을 배웠다는 사실을요. 길 위에서 제가 배운 사랑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지금 네가 있는 자리에서 네가 도울 수 있고 도와야 하는 사람에게 작은 친절과 배려를 즉각적으로 베풀라. 그것이 곧 내게 하는 것이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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