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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구의 발뒷꿈치를 보면서 걸었다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1. 12. 29.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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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의 발뒷꿈치를 보면서 걸었다.

     

    나는 군대에 늦게 갔다. 24세 겨울에 입대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30세 넘어서까지 사법시험에 도전하다가 계속 떨어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어떤 형님도 계셨다. 하지만 이렇게 아예 늦어버린 경우(통계학적 말하자면 너무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보통 사람들보다 3년 늦게 간 내가 다른 사람들 눈에도 아주 늦게 보였을 터이고 나 자신이 생각해도 늦었다.


    이렇게 늦었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 때가 자주 있었다. 바로 나보다 두세 살 어린 동생 녀석들이 고참이랍시고 나에게 반말을 할 때. 지금 와서는 나이 차이가 뭔 상관인가 싶고, 나란 사람이 워낙에 수직적인 문화를 싫어하는 편이라서 별로 상관 안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이상하게 나이 차이가 크게 느껴졌고, 또 결정적으로... 나이 어린 고참에게 구타라도 당하는 날이면... 처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나마 천만 다행이었던 건, 군대생활을 하면서 내 삶에 큰 힘이 되어 준 베스트 프렌드를 만났다는 사실 덕분이다. 정상경 변호사. 지금은 어엿한 중견 변호사가 되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정말 앳되게 생긴 까까머리 고참이었다. 군대에서 만난 인연은 사실 거의 모두 구타나 가혹행위와 관련되어 있기에 잊고 싶은 게 자연스럽지만, 상경이는 진짜로 내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


    가장 기억 나는 일은, 행군을 할 때마다 내가 그의 발뒷꿈치를 보면서 걸었던 일이다. 우리 부대는 정말 훈련을 많이 받았는데, 경기도 지역에서는 멀리 강화도부터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돌아 다녔다. 우리는 민간인에게 폐를 끼치면 안되기 때문에, 행군은 늘 사람이 안 지나다니는 산이나 외딴 길로만 다녔다. 그러니까 길을 만들면서 다녔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듯 하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 물품 중에서 '정글도'라는 칼도 있었다(숲을 헤치면서 가는 용도).


    행군할 때 가장 괴로운 요소는 두 가지였다. 첫째,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는 지루함. 대개 소대장이 "야, 우리 지금 다 왔어" 라고 말하면 적어도 6시간 정도는 더 가야 하는 지점이었다. (X발) 둘째, 겨울철 행군할 때 온몸으로 느끼는 한기. 겨울철에는 행군이 더욱 힘들어진다. 걷기 시작하면 쪄서 죽고, 힘들어서 쉬기 시작하면 추워서 죽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래도 내가 걷기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힘들어 하긴 해도 낙오를 하거나 그렇게 뒤쳐지는 일은 없었다는 점이다.


    행군할 때는 두 가지 스타일로 갈린다: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과 바로 눈앞을 바라보는 사람.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은 지금 여기 내가 걷고 있는 행위가 끝없이 반복되는 것 같아서 오히려 먼 곳을 보면서 조망하는 거고, 바로 눈앞을 바라보는 사람(나같은 사람)은 목표 지점은 어차피 너무 멀어서 오히려 까마득하게 느껴져서 힘이 빠지기 때문에 바로 눈앞을 바라보는 거였다. 그런데 내 기억으론 거의 언제나 나는 상경이 바로 뒤에서 걸었기 때문에 행군, 하면 바로 상경이 발뒷꿈치가 생각난다.


    며칠 전에 파주로 드라이브를 갔다. 날씨는 맑았지만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바람에, 정말로 춥게 느껴졌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맞으면서 조금 걸었는데, 바로 군대 시절이 생각났다. 그리고 상경이 발뒷꿈치를 보면서 걸었던 생각이 났다. 그런데 사실 곰곰 따지고 보면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우리는 서로 친구의 발뒷꿈치를 보면서 걸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역한 후에 나는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서' 대학 입학 시험을 다시 치루고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상경이는 법대에 복학해서 공부하다가 졸업 후에는 신림동 고시촌으로 들어갔다. 내가 여자친구가 있을 때, 누군가 좋아하게 되었다는 그에게 연애 상담을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나 같이 연애에 서툰 사람이 연애 상담이라니... 우습다.) 그가 한참 동안 신림동에서 썩어가며 사법시험을 계속 떨어지고 있을 때, 나는 그가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언젠가 내가 삶에서 제일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 그래도 힘을 내서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 친구 상경이가 자기 발뒷꿈치를 내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괜찮다고, 자기 보고 따라 오라고, 말 없이 힘을 보태 주었기 때문이다. 거의 죽지 못해서 겨우 숨만 붙어 있을 때, 그가 보여준 발뒷꿈치가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어쩌면 내 눈에 보였던 그의 발뒷꿈치는 내가 결정적으로 세상을 등지지 않은 가장 강력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참 웃긴 일은, 그가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내가 그에게 말했을 때, 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단 거다. 시험을 계속 떨어지면서 온갖 힘든 마음이 들었을 때 내가 했던 말 몇 마디가 힘이 된 적이 있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기억도 안났는데... 그가 그렇게 힘들어 하고 있을 줄도 몰랐는데... 그래서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서로 발뒷꿈치를 보여주고 보면서 걸었던 건 아닌가 싶다.


    우리가 만난 지도 20년이 훌쩍 넘었다. 너무나도 앳된 얼굴이었던 녀석이 부인, 아들, 딸을 둔 중년 가장이 되었다. 나도 나이를 먹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정말로 힘든 시간도 겪었고, 뒤늦게 결혼해서 딸도 얻었다. 우리는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맨날 불러내서 술을 마시는 사이도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바로 옆에 있는 듯, 서로 진심으로 응원하고 도와주는 가까운 친구 사이다.


    우리 우정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발뒷꿈치 우정이라고 칭하고 싶다: 친구야, 나는 지금도 네 발뒷꿈치를 보면서 걷는 느낌이 든다. 내가 네게 도움이 될 일이 생길 지는 모르겠다만, 나도 네게 언제든 발뒷꿈치를 보여주며 걷고 싶다.


    <참고> 사진에서 왼쪽 끝이 나, 오른쪽 끝이 상경이다. (헬기 레펠 훈련 받다가 한 컷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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