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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D+454)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3. 5. 9. 10:10728x90반응형
아마도, 우리 가족은 2023봄을 지긋지긋하게 안 떨어지는 감기로 기억할 듯하다. 우선, 딸 아이가 감기에 걸린지 한 달이 넘어가는데, 아슬아슬하게 나을듯 안 나을듯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아내도 심하지는 않지만 감기에 걸렸는데, 보름째 콜록대면서 마른 기침을 하고 있다. 나는? 어쩌면 가장 심각한 감기라고 말할 수 있는, '폐렴'에 걸렸다가 서서히 낫는 중인데, 가슴팍에서 노래 소리가 들리는 폐렴 증세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가래가 끓고 기침이 끝나질 않는다.
헌데, 어젯밤... 아니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늘 새벽 12시쯤, 딸 아이 증세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기침을 하려다가 가래가 목에 걸리는지 숨 넘어가는 소리를 하면서 괴로워한다. 물 마시려고 잠시 일어났다가 놀라서 나를 깨운 아내는 당황하고 안타까워서 벌써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딸보다 아내가 더 놀란 듯 보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증상이 심상치 않은데, 인터넷 등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찾느니, 아예 병원 응급실에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이 어디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평소 자주 지나치던 곳인데도 응급실 찾기가 어려웠다. "저기다!" 겨우 응급실 출입문을 발견하고 대로변에 대충 주차한 후에 아이를 품에 안고 달려갔...는데, 응급실 문을 열자마자 만난 접수처 간호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음... 죄송하지만, 저희 병원 응급실에서는 소아과 선생님이 안 계셔서, 근처 다른 병원으로 가셔야 할 것 같아요."
말로만 듣던, '소아과 의사 부족 사태'를 피부로 느끼는 순간. 소아의학회 회원들이 집회를 열고 '소아과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 아무도 지원하려고 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문의 훈련 체계가 붕괴하고 있다'고 호소하던 뉴스를 TV 화면에서 본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우리 딸처럼, 말 못하는 영아를 포함해서 언어적으로 미숙하고, 참정권(투표권)도 없으며, 따라서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 만한 힘이 거의 없는 어린이 집단은 그냥 죽으라는 거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 곳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순 없었다. 곧바로 다시 차에 올라 타서 또 다른 대형 병원으로 향했다. 가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이곳에는 일반응급실 외에 소아만 전문적으로 받는 소아응급실이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시내에서 운전하면 네비게이션에 거의 언제나 뜨는 '50km/h 속도 제한' 알람 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엑셀을 밟았다. 이렇게 10분 만에 병원에 도착해서 소아응급실로 직행. 이곳엔 소아과 전문의가 있어서 무사히 접수할 수 있었다.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우리 딸은 '가벼운 인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듣기엔 어려운 말이지만, 쉽게 말해 목이 조금 부었다는 뜻. 최근에 내가 폐렴을 앓았기 때문에, 그리고 아이가 호흡할 때 숨소리가 거칠어서 혹시나 폐렴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냥 염증이라고 하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응급 질병이 아니라서 보험 적용이 안 되고, 그래서 병원비가 16만원 나왔지만 괜찮았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아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니 새벽 1시 반이 넘었다.
다시 잠자리에 들어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강남권에 사니까 이렇게 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20분 이내로 도달할 수 있는 대형 병원이 세 곳이나 있지만, 인적이 드문 곳에 사는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른이 아픈 일이야 그렇다 치고, 아이가 갑작스럽게 아프면? 어디 뼈라도 부러지거나 해서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라면? 천신만고 끝에 병원에 달려 갔는데, '죄송하지만 소아과 의사가 없어서, 다른 병원에 가셔야 해요'라는 말을 듣는다면?
솔직히, 아찔하다.
어떤 나라가 선진국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로 세울 수 있겠지만, 나는 '의료와 교육을 얼마나 공공재로 생각하는지'가 필수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세상은 필연적으로 불공평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최소한 아플 때 마음 편히 치료받고, 배우고 싶을 때 마음 편히 배울 수 있는 나라여야 선진국 아닐까? 돈이 없다는 이유로, 근로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배척받고 학교에서 배척받는다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선진국일 수 있겠는가?
우리는 특히 의료 서비스에 대해서 공공적인 가치관을 확고하게 세워야 한다: 의료 서비스는 상품이 아니다. 의료가 상품이 되는 순간, 어디선가에서는 엄청난 비용을 쓰면서 귀족 서비스를 받는 일이 생기고, 반대쪽 어디선가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응급 환자를 돌려 세우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 환자가 나와 상관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넘길 수도 있겠지만, 바로 나, 혹은 내 가족이라면 문제가 전혀 다르다. 특히, 아무런 힘도 없는 영아가 아프다면?
어째서!? 이렇게나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에서 소아과 전문의가 부족한지 좀 더 찾아서 들여다 봐야겠다. 어째서!? 내 아이가 갑자기 아파서 대학 병원에 갔는데 소아과 의사가 부족해서 진료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공부해 봐야겠다. 그리고 의료 공공성을 저해하려는 정치적/사회적 움직임을 주의 깊게 감시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야겠다. 아빠로서, 시민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우리 딸이 아플 때 거절당하지 않는 나라에서 살고 싶어서.
<50주 동안 이어질 강점관점실천 공부 자료 나눔 프로젝트>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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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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