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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하게 글머리를 쓰는 방법(예시)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4. 3. 1. 07:21728x90반응형
"남편과 결혼할 때 약속했다. 매년 한 나라 이상 여행하여, 환갑이 되었을 때는 세계 일주를 완성하자고. 남편은 어떤 약속이든 성실하게 잘 지켜서, 우리는 지금도 매년 신나게 지구본 위를 누빈다. 우리는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기에, 좋은 호텔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여행하진 못하고, 그냥 가볍게 배낭여행으로 다닌다. 예컨대, 태국에서는 현지인들이 사는, 선풍기 하나만 덜렁 있는 ‘팬룸’에도 머물고, 독일에서는 혼성기숙사에서 자며 문화적 충격도 겪는다.
2023년 3월, 코로나 팬데믹이 잠잠해지자마자 우리 부부는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하 생략)
위 글은, 대전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권송미 원장님(사랑누리장애인단기보호센터)께서 쓰셨다. 권송미 원장님은 내가 글쓰기를 가르친 학생 중에서도 단연 '훌륭한 이야기꾼'이시다. 심성이 참 맑아서 글을 투명하게 쓰시고, 뭔가를 묘사하실 때 표현력이 기가 막힌다. 무엇보다도, 글을 쓰고 싶어하는 표현 욕구가 대단히 강력하다.
한편, 약점도 있다. 원장님 마음 속에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가득해서, 실제로 글로 풀어내실 때 핵심 주제 외에 군더더기를 많이 쓰신다. 하고 싶은 말은 참 많은데, 내용을 적절하게 잘라내고 편집하는 기술을 충분히 체화하진 못하신 듯하다. 남다른 표현욕을 가진 댓가를 치르신다고 본다. 허나! 할 말이 없는 사람보다 훨 낫다.
과격한(?) 선생이 '군더더기'를 줄이시라고 빨간펜을 끝없이 그어대도, 원장님께서는 전혀 기가 죽지 않으셨다. 늘 군말 없이 지적 사항을 경청하시고, 적극적으로 소화하려고 애쓰셨다. 선생으로서 가르치다 보면 다양한 학생을 만나지만, 우리 권송미 원장님처럼 꾸준히 노력하며 발전하는 학생이 제일 보기 좋고 자랑스럽다.
학생 자랑은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자. 후후.
위에 제시한 예시문은, 권송미 원장님께서 쓰신 글머리 중에서 최고다. 신속하고 경쾌하게 글 소재를 밝히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보통 할 말이 많으면 내가 진짜로 쓰고 싶은 내용까지 들어가는데 시간이 소요된다. 예를 들어, 해외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하려는데, 여행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한다든지, 첫 여행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면 글이 시작부터 늘어지기 시작한다. 독자는 글자가 눈에 보이니 읽긴 하지만 마음 속으론 이 생각만 떠올린다: '아니, 그래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할 건데?'
이렇게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생각나는 대로 쓰기 때문이다. 이런 습관이 있는 사람은, 글을 말처럼 생각한다. 우리는 그냥 생각나는대로 말한다. 현장감이 있으니까 잠시 삼천포로 접어들어도, 내용이 조금 틀려도, 술술술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글은 말처럼 생각나는 대로 쓰면 안 된다. 어쩌면 말은 하나로 쭉 이어진 전체지만, 글은 조각난 생각 부스러기를 잘 닦고 이어 붙여서 올려 세운 누더기 편집물이다. 미리 생각하고 정리해서 쓰지 않으면 '대단히' 지저분하게 느껴진다.
서두를 늘어지게 쓰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독자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 특별히 친절하지도 않고, 특별히 매몰차지도 않다. 독자는 내가 아무리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마음을 활짝 열고 끝없이 들어주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초장부터 덮어놓고 비판하거나 외면하지도 않는다. 독자는 남이 쓴 글을 읽으면서 그냥 자신에게 흥미롭거나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나고 싶어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으면 스스로 마음을 활짝 연다.
만약 서두를 쓸데없이 길게 쓴다면, 비유컨대 그대는 독자 품에 안겨서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 독자가 원하는 재미나 의미는 안 주고서, 독자가 그대를 받아주기만을 원하는 셈. 그대에게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아주 세게 말하자면, 이는 완전 '도둑놈 심보'다. 독자는 여러분 어리광을 받아주는 엄마가 아니다. 그대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온갖 군더더기 이야기를 들으면서 독자가 노동하도록 두면 안 된다. 그대가 이야기를 꺼냈으므로, 노동은 그대가 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서두를 써야 할까?
소재로 바로 들어가야 한다. 바로 들어가되, 맥락은 충분히 친절하게 설명해야 한다. 추상적으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어려우니, 위 예시문으로 돌아가서 뜯어 보자. 우선, 첫 두 문장이 참 좋다. "남편과 결혼할때 약속했다. 매년한 나라 이상 여행하여, 환갑이 되었을 때는 세계 일주를 완성하자고." 남편과 내가 등장하고, 두 사람이 매년 해외 여행 가자고 약속했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글감(아마도 해외 여행기?)을 한 방에 소개했다. 독자는 흥미가 쫙 당긴다!
첫 단락만 읽어도, 독자는 많은 직/간접적인 정보를 효율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 (1) 글쓴이는 기혼녀다. (2) 글쓴이는 (해외처럼) 낯선 곳으로 여행가는 일을 즐긴다. (3)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부지런하며, 소박하고, 검소하다. (4) 아마도, 그동안 다닌 여러 여행지 중에서 한 곳에 관한 내용이 이어질 듯하다. 그렇다! 그 다음 단락 첫 문장을 읽어 보니 태국 여행 이야기가 곧바로 시작된다. (이후 내용에서는 태국에서 비행기를 놓쳤지만 오히려 무척 재미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서두 뿐만 아니라 글쓰기는 잘라내는 기술이다. 무수한 사건이 끝없이 생기는 인생 타임 라인 상에서, 글로 담고 싶은 대목을 툭, 잘라서 표현하고 싶은 특정 부분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무심하게 툭, 자르는 능력이 필요하다. 서두를 늘어지게 쓰면, 피사체를 정확하게 고르지 못했다는 말이 되고, 글을 쓰는 나 자신이 글 내용을 전혀 정리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야기 하는 필자가 정리하지 못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정리하라고 요구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어렵지 않다. 툭, 하고 잘라먹고 들어가라.
독자는 구구절절 오만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글 내용을 쉽게 이해하지 않는다. 그냥 무심하게, 부담없이 이야기를 시작해야 오히려 관심을 보인다. 먼저, 부담없이 관심을 끌어낸 후에, 진짜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줘도 된다는 신호가 제대로 왔을 때, 그때 있는 힘껏 이야기를 펼쳐야 한다. 아직 대문에도 들어서지 못했는데,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갈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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