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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션왕은 어디로 갔을까
    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4. 4. 18.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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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왕은 어디로 갔을까

     

    글쓴이: 김정현 (안동성좌원 요양복지과 팀장, 2023)

    첨삭 지도: 이재원 (강점관점실천연구소, 2024)


    친정집 앨범 속에서 여덟 살 친언니가 둥근 칼라 블라우스와 멜빵 치마를 입고 웃는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비슷한 사진이 또 보인다. 자세히 보니 내 1학년 봄 소풍 사진이다. 같은 옷, 같은 단발머리에 장소까지, 흑백 사진 속 두 사람은 터울이 여섯 살이나 지는데도 똑닮았다. 내가 조금 더 예뻤으니(?!) 망정이지, 정말 헷갈린다. 후후. 물려 받은 물건은 언니와 오빠의 옷가지 뿐만 아니라 사촌 언니과 육촌 오빠가 읽던 책까지 다양했다.

     

    고등학교 때 엄마가 할부로 사다 놓은 시커먼 가죽 구두는 찰리채플린 신발처럼 앞코가 둥글게 솟아있었다. 두툼한 뒤축이 닳을 때까지 2년 넘게 신었다. 내가 그런 디자인을 사 달라고 했었나? 아니면 엄마가 이 모양을 좋아했나? 혹시, 가격이 적당했나? 단골에게만 월부를 끊어주던 옷집 사장님이 추천했을까? 강의용 필기구를 잔뜩 넣고 다니던 겨울 사파리 잠바도 엄마가 단골 옷집에서 육 개월 할부로 떼써서 가져 왔다. 그래도 무척 따뜻해서 대학 4년 동안 마르고 닳도록 입었다. 헌 옷도 마다않던 처지였기에 새로 옷을 사 주시면 무조건 감지덕지하며 받아 입었다. 걸쳤다. 는 마음으로 받았다.

     

    엄마는 헌옷을 얻어다 손질해입히며 우리 사남매를 키웠다. 그리고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깨끗하면 입지 유행이 무슨 소용이냐?” 이 말씀이 몸과 마음에 배였는지 나도 아이들을 키울 때 남이 입던 옷을 많이도 얻어 입혔다. 맞으면 그냥 입으니까. 내 형편으로 살 수 없는 비싼 옷가지와 장난감을 감사히 받았다. 다행히, 우리 아이들은 내가 챙겨주는 대로 잘 입고 다녔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예컨대, 막내 딸은 초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유행이 지났다, 자기가 좋아하는 색이 아니다.”라며 얻어 온 옷을 입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무던하던 첫째도 대학에 입학하면서 패션에 눈을 떴다. 녀석은 타지에서 한 학기를 지내더니 등에 커다란 그림이 그려진 풍성한 항공 점퍼와 주머니가 잔뜩 달린 후줄근한 바지를 발목 위로 당겨 입고 나타났다. 줄무늬 양말에 밑창이 두툼한 운동화와 챙 없는 모자를 쓴 힙합 패션, 일명 ‘힙질이’가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온 가족이 입을 헤 벌리고 쳐다 봤다.

     

    내가 휘둥그레 눈을 뜨고 섰는데 녀석이 랩을 하듯 몇 마디 날렸다.

     

    “엄마가 옷은 깨끗하고 단정하게만 입으면 된다고 했잖아. 그래서 얻은 옷, 인터넷에서 저렴 하게 산 티셔츠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입었거든. 그런데 내가 직접 옷을 사려고 하니까 마음에 드는 게 뭔지 생각하게 되고 아무 거나 사질 못하겠더라. 내가 좋아하고 나한테 어울리는 ”나만의 스타일“이 있었달까. 이젠 집에서 가져 간 옷은 하나도 못 입겠어. 옷도 내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야.”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라 반박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순순히 내가 건네준 옷을 “걸치고” 다닌 아들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얻어온 옷 중에 멋쟁이 친구들이 입는 옷과 비슷해서 유행에 어울릴 만한 패션 연출이 가능한지, 내 우람한(!) 어깨를 살포시 감싸줄 귀물이 있는지 뒤적거렸던 것 같다. 희미하게나마 내 취향을 찾고 싶었나 보다.

     

    문득, 옷걸이를 뒤적여 본다. 무채색 블라우스, 체크 무늬 쟈켓, 검은 바지 대여섯 벌. 중년 직장 여성이 무난하게 입을 만한 출근룩이 걸려 있다. 서랍 속에는 언니, 지인, 생활관 할머니들이 챙겨준 헐렁한(?) 티셔츠가 잔뜩 쌓여있다. 저게 내 스타일일까? 나는 여전히 몸에만 맞으면 걸치는데... 내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색과 디자인이지만 사실 나에게 딱 잘 어울리는 나만의 패션 스타일이 있진 않을까? 지금부터라도 용기를 내어 찾아보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언젠가 나도 최소한 나에게 잘 어울리는 패션에 대해서 한 마디 정도는 말하고 싶어졌다.

     

    <안내> 

    _ 본 글은 직접 글을 쓰신 김정현 팀장님께 공식적으로 사용 허락을 받았습니다. (교육 및 출판 목적)

    _ 김정현 팀장님께서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글쓰기 클래스 심화반 '글로위로'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이재원 선생 피드백>

     

    1. 바야흐로, 김정현 월드가 무르익었네요. 현실에선 봄이 와서 진달래가 피는데, 김정현 월드는 늦가을 감처럼 무르익어서 툭, 떨어집니다. (네, 극찬입니다.) 글이 김정현스러워서(짙은 문학성) 참 좋습니다. 

     

    2. 처음에 마음에 품으셨던 먹물이 쭉 빠지고 문장이 더욱 부드러워지니까, 그 안에 숨어 있던 진짜 김정현 글이 영광스럽게 탈출했습니다. 음... 이젠 마음 놓고 달리셔도 됩니다. 암요. 마구 달리셔야죠. 

     

    3. 구성이 촘촘하고 설명이 충분하니, 독자가 김정현 월드에 직접 들어가서 구경한 듯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면 무척 글이 짧습니다. 맞습니다. 글이 적절하게 포화되니, 마법이 벌어집니다. 간결한데 풍성합니다. 

     

    4. 어법에 관해서 한 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김정현 선생님께서 초고에 쓰신 문장, 스스로 고친 문장, 그리고 최종적으로 제가 첨삭한 문장을 열거하겠습니다. 

     

    (초고) 무조건 감지덕지하는 마음으로 받았다. 

    (재고) 무조건 감지덕지하며 걸쳤다. 

    (첨삭) 무조건 감지덕지하며 받아 입었다. 

     

    초고에서는 문장 앞쪽이 긴데, 결국 관형절이 되어서, '마음'을 꾸밉니다. 전형적인 '(긴) 관형절 + (짧은) 명사' 구조입니다. 그런데 한국어는 '체언'보다는 '용언'을 강조해야죠. 이 원리를 스스로 포착하셔서, 관형절 끝 어미를 바꿔서 부사절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동사를 '받았다'에서 '걸쳤다'로 바꾸셨지요. 아주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걸치다'는 '입다'와 의미가 살짝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걸치다'는 사물이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일부만 건다, 는 어감이니까요. 그래서 '입는다'로 바꾸었습니다. 아울러, 그냥 '입었다'보다는 '받다'를 병기하면 초고에 쓰신 문장 뜻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듯하여 고쳤습니다.  

     

    5. 이 아름다운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역시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무지하게 많구나. 학생에게 한 수 배웠다. 참 감사하다!'


    <평범한 사회복지사들이 글로써 소박하게 자기 삶을 정리한 이야기>

     

    성숙을 담는 글쓰기(PDF 버전)

    '자기-돌봄(self-care)'를 주제 삼아 인천광역시사회복지사협회가 기획하고, 지난 수 년간 사회복지사에게 글쓰기를 가르쳐 온 강점관점실천연구소에서 진행했습니다. 인천시 각 지역에서 성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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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주 동안 이어질 강점관점실천 공부 자료 나눔 프로젝트>

     

    50주 동안 이어질 강점관점실천 공부 자료 나눔 프로젝트

    내가 가르친 뛰어난 사회사업가께서 들려 주신 이야기: "제가 돕는 청소년이 너무 기특한 행동을 하기에, 저나 제 동료들이나 아주 자연스럽게 물어보게 되었어요. '우와~ 너 어떻게 이렇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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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강의/자문/상담 문의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010-8773-3989 / jaewonrhi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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