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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죽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4. 8. 20. 06:59728x90반응형
갱죽
글쓴이: 김정현 (안동성좌원 복지기획과 팀장, 2024)
첨삭 지도: 이재원 (강점관점실천연구소, 2024)
비가 온다. 일주일째 쉬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찌푸린 하늘에서 부슬부슬 비가 내려 덥고 습하다. 퇴근길에는 와이퍼를 2단으로 틀어야 운전이 가능할 정도로 비가 쏟아진다. 피부는 땀이 배어나와 꿉꿉하고 바지 밑단은 빗물에 젖어 척척하다. 열기가 가득한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었다. 다행히 아들이 내 퇴근시간에 맞춰 에어컨을 틀어놔서 집안 공기는 살만하다.
뭘 먹나? 더위에 지쳐 입맛도 없지만 한 주 동안 수고한 나를 위해 뭔가 흐뭇하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 창밖을 보며 비 오는 날 어울리는 음식을 생각해 본다. 김치 부침개는 어떨까? 이 더위에 기름칠해가며 전을 부치라고? 아니지! 칼국수도 맛있는데. 칼국수를 사러 저 빗속을 다시 뚫고 마트에 다녀와야하는데 가능하겠어? 역시, 아니지! 두어번 도리질하고 나니 시장기가 더 심해진다. 이때 갑자기 어떤 음식이 머릿속을 스친다.
고등학교 1학년 봄으로 기억한다. 엄마는 웬만해선 감기도 걸리지 않는데, 그땐 호되게 앓아 누웠다. 죽도 마다하고 앓아 누운 엄마대신 동생과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 집안일도 나눠하며 며칠을 보냈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니 현관에 아줌마들 신발이 잔뜩 쌓였다. 아줌마들은 벽에 기대 앉은 엄마 주변으로 둘러앉아서 병문안을 왔는지 마실을 왔는지 하하호호 수다떨기 바빴다. 잠시 후 아랫집 아줌마가 “자, 비켜 비켜!”라고 외치며 커다란 양은 냄비를 행주로 감싸쥐고 거실 한가운데로 종종거리며 나왔다. 냄비 뚜껑을 열자 허연 김이 무럭무럭 오르고 구수한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침을 꼴깍 삼키며 냄비 안을 들여다 보고는 깜짝 놀랐다. 감나무 밑에 묶어키우다 복날이 지나면 사라지는, 누렁이에게나 어울릴 법한 잡탕죽이었다. 먹다 남은 찬밥, 감자조림, 콩나물, 신김치, 대파, 라면, 국수, 수제비 조각이 되직한 국물과 함께 냄비 안에 가득했다.
‘아픈 사람 병문안을 오려면 복숭아 깡통이라도 사들고 오든지 이게 뭐야.’
아줌마들은 죽을 한 대접 떠서 먼저 엄마 앞에 놓아 드리고 숟가락도 쥐어 드렸다.
“입맛 없다고 안 먹으면 더 안 나아요. 얼른 잡숴 봐요. 맛이 끝내줘요. 니도 얼렁 먹어.”
앞집 아줌마가 뒷걸음치는 나를 붙잡아 앉히며 국그릇을 내민다. 아줌마들은 빈 숟가락만 빠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저질에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어느새 엄마도 숟가락질이 잦아진다. 나도 마지못해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맛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젖히고 '화화
~'열기를 식힌다. 호로록 면발을 당기니 콩나물도 따라 올라온다. 수제비를 뜨니 양념이 잘 밴 감자가 숟가락에 같이 담긴다. 이마에 땀이 맺힌다. 흐르는 콧물을 훌쩍 들이 마신다. 맛있다. 끝내준다. 어느새 그릇이 비었다. 옆에 아줌마가 눈치를 채고 한 국자 더 떠담아 주신다. 갱죽을 처음 먹는 사람처럼 후후 불어가며 한 그릇을 더 비웠다.엄마도 뜨거운 죽을 먹어서 그런가 창백하던 얼굴이 발갛게 상기 되었다. 밥상을 치우고도 아줌마들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커피를 마시고 과일을 먹어가며 틈틈이 크게 웃고 목소리를 낮춰 시어머니 흉을 보다가 남편 흉을 본다. 벽에 기대 앉았던 엄마도 어느새 대화에 끼어들어 거든다. 한참이 지났다.
“야들아, 저녁하러 안 가나?”
엄마가 벽걸이 시계를 가리키자 아줌마들은 마법에서 막 풀려난 신데렐라처럼 깜짝 놀라며 자기들 집으로 흩어졌다. 다섯 시였다. 엄마도 끙~ 무릎을 짚고 일어서서 주방으로 향했다. 달그락 달그락 쌀 씻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날 먹은 누렁이네 죽탕은 알고 보니 “갱죽”이라는 제 나름대로는 족보가 있는(?) 음식이었다. 그 후로 가끔 입이 궁금한 날이면 엄마에게 슬쩍 주문서를 넣었다. “엄마, 그거~ 그거 해먹자.” 그러면 엄마는 씩 웃으며 남은 반찬을 몽땅 털어넣고 죽을 끓여주셨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빙긋 웃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다. 그래, 오랜만에 “갱죽”을 먹어보자. 냉장고를 열어 신김치와 대파를 꺼낸다. 오늘은 먹다 남은 김치찌개를 기본으로 깔자. 물을 더 붓고 된장, 고추장을 풀어 끓기 시작하면 불을 낮추고 잔치국수와 대파를 넣은 후 푹 익힌다. 국물에 밀가루 물을 조금 둘러서 되직한 느낌을 살려본다.
“간다, 비켜비켜~.”
냄비 째로 테이블에 털썩 올려놓고 국그릇에 각자 덜어 먹는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손등으로 코밑을 쓱 훔친다. 냄비째로 들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신다. ‘으쌰!’ 찌뿌둥했던 몸이 개운해진다.
<안내>
_ 본 글은 직접 글을 쓰신 김정현 팀장님께 공식적으로 사용 허락을 받았습니다. (교육 및 출판 목적)
_ 김정현 팀장님께서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글쓰기 클래스 심화반 '글로위로'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이재원 선생 피드백>
1. 저는 어릴 때 토요일 하교 시간이 제일 즐거웠습니다. 당시에는 토요일 오전에도 수업했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1시 쯤 TV에서 '전격 Z 작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시계에 대고 말하면, 어디선가 쌔근한(?) 스포츠카가 달려와서 악당을 무찌르고, 마치 사람처럼 가볍게 농담을 던지고 사라지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액션 시리즈였죠. 당시에는 이 외화 드라마가 너무 재미있어서 매주 토요일 오후를 손꼽아 기다렸답니다. 하하.
2. 그런데 오늘 이 글을 읽으니, '전격 Z 작전' 외에도 제가 토요일을 기다린 이유가 생각났습니다. 바로 어머니께서 슥슥 만들어 주시던 평범한 김치볶음밥. 네, 이 음식, 정말로 평범하죠. 당시에는 잘 몰랐어요. 그냥 토요일에 집에만 오면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셨으니까.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저는 '전격 Z 작전'과 '평범한 김치볶음밥'을 한 묶음으로 받아들였어요. 토요일 오후에만 즐길 수 있는, 뭔가 상세하게는 설명못할 나른한 기분. 방에 널부러져서 편안한?
3. 각설하고, 현재에서 과거로 넘어갔다가 다시 현재로 넘어오는 과정이 무척 자연스럽고 부드럽습니다. 그냥 술술술 넘어갑니다. 무엇보다도, 표현력이 대단히 좋습니다. 식사 장면을 훌륭하게 묘사하셔서 가만히 글을 읽고 있노라면, 김정현 선생님 손을 붙잡고 그때 그시절로 빨려 들어갑니다. 아울러, 삼천포로 빠지지 않으시고 시종일관 '갱죽'에만 초점을 맞추셔서 좋습니다. 덕분에 한 호흡으로 쭉 읽을 수 있었어요. 필력이 날이 갈수록 좋아집니다그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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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010-8773-3989 / jaewonrhi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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