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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서술 사례 연구: 시간을 가지고 놀다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6. 2. 3. 15:05728x90반응형

사례 연구: 시간을 가지고 놀다
원래 시간은 객관적으로 일정하게 흐른다. 조건에 따라서 더 빨라지거나 더 느려지지 않는다. 그냥 1초씩 균일한 속도로 흐른다. 그런데 사람이 느끼는 시간은 많이 다르다. 보고 싶은 TV 프로그램을 기다릴 땐 화면에서 20초씩 스쳐 지나가는 CF도 2시간이 넘는 것처럼 길게 느껴지고, 막상 그 TV 프로그램을 보면 2시간이 20분처럼 빠르게 지나는 듯 느껴진다. 왜 이럴까?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시청하는 시간은 이미 객관적이지 않다. 사람 감정이 드러가니까. 주관이 들어가니까.
사람은 이야기 속에 감정을 담으니, 이야기 속 시간도 객관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마치 롤러 코스터가 위 아래로 파동을 그리며 움직이듯이, 이야기 속 시간은 어떤 대목에서는 무척 빨리 가고, 어떤 대목에서는 무척 느리게 간다. 이야기 속에서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과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먼저 이야기 속에서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은,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생략하거나 짧게 요약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말은, 중요한 내용을 자세하게 쓴다는 뜻이다.
이야기에는 특정 기간 시간 중에서 글쓴이가 선택한 일부 시간만 담긴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아침에 러닝한 이야기를 쓴다면, 운동장에 나가서 실제로 뛴 내용이나 뛰면서 든 생각이나 감정을 주로 담지, 운동화를 어떻게 신었는지나 다 뛰고 나서 어떤 음료를 마셨는지는 주목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위에서 논의했듯, 그렇게 선택한 일부 시간도 그냥 균일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글쓴이가 중요하게 보는 대목은 시간을 멈춰서 쓰느라 분량이 많아지고, 덜 중요하게 보는 대목은 빨리 넘기느라 분량이 적어진다.
결국 독자는, 글쓴이가 해당 사건을 겪으면서 느낀 시간 감각을 분량으로 감지한다. 글 분량이 많아지면 독자는 글쓴이를 따라서 발걸음을 서서히 늦추다가 어느 지점에선 완전히 멈춰서, 글쓴이가 손가락을 뻗어 지목한 대상을 함께 바라본다. 반대로, 글 분량이 적어지면 독자는 글쓴이를 따라서 빨리 걷고, 나중엔 뛰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시간을 완전히 건너 뛰어서 점프한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일수록, 주제에 맞춰서 반복적으로 시간을 늦췄다 조이면서 독자를 능숙하게 설득하면서 글 속으로 초대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거실에 나와서 딸과 함께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다가,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온라인 게임을 떠올렸다. 딸도 좋단다. 그런데 즐거운 일은 마땅히 가족이 함께해야 하는 법! 암, 방에서 쉬고 있던 남편도 불러냈다. 남편도 나처럼 쉬고 싶었는지, 거실로 나오면서 날 따갑게(?) 쳐다봤지만, 나는 모른 체했다. (남편 미안)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신나게 게임을 즐겼더니 어느새 창밖이 어둑하다. 밥때가 되어서 나는 주방으로 가서 저녁을 차렸다. 남편과 딸은 방에서도 뭐 하고 노는지 중간중간 문틈으로 까르륵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순간 나도 지그시 미소짓는다."
위 예시 단락을 놓고, 권선미 사회복지사께서 구사하신 '시간을 다루는 방식' 을 분석해 본다. 먼저, 이 단락에 표현된 사건이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났는지 따져 보자. 글쓴이는 일요일 오후 시간대에 생긴 사건을 다루었다. 대략 오후 4시부터 7시 정도까지니까 3시간쯤 된다. 이 세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작은 사건이 벌어졌으리라. 하지만 권선미 선생님께서는 그 모든 작은사건을 다 보여주지 않으셨다. 어떤 시간은 생략하셨고, 어떤 시간은 요약하셨으며, 어떤 시간은 (짧지만) 거의 실시간으로 보여주셨다.
생략: 세 식구는 4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 약 2시간 동안 온라인 게임을 즐기셨는데, 이 두시간 동안 서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는 쓰지 않으셨다(거의 생략하셨다). 왜? 게임 자체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가족이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면서 느꼈을 사랑, 신뢰가 훨씬 더 중요하니까.
요약: 세 식구가 온라인 게임을 시작하게 된 과정(네 문장: 울며 겨자 먹기로 ~ 나는 모른 체했다) , 그리고 권선미 선생님께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신 과정(한 문장: 밥때가 되어서 나는 주방으로 가서 저녁을 차렸다). 이 두 부분은 생략해선 안 되었다. 만약 생략했다면 사건이 앞으로 진행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고 독자가 세부 사항을 모두 알 필요도 없다. 부모는 무척 피곤했지만, 딸이 원해서(딸을 사랑해서) 기쁘게 끌려 나왔다, 정도까지만 표현해도 충분했다. 그리고 식사 준비 과정도 속속들이 알 필요는 없다.
장면(실시간 사건 진행): '남편과 딸은 방에서도 뭐하고 노는지 중간중간 문틈으로 까르륵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 일은 분명히 과거에 일어났지만, 서술어('새어 나온다') 시제를 살펴보면, 현재 진행에 가까운 현재형이다. 독자는 이 대목에서 글쓴이와 함께 방문 틈 쪽으로 귀를 기울여서, 아빠와 딸이 나누는 대화를 경청한다. 그러니까 글쓴이는 바로 이 순간 직관적으로 느낀 '따뜻한 가족애'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어했다.
정지: '남편과 딸은 방에서도 뭐 하고 노는지 중간중간 문틈으로 까르륵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글쓴이는 이 문장을 서술하면서 시간 진행 속도를 늦추고, 다음 문장 '순간 나도 지그시 미소짓는다'에 이르러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독자를 마음 속으로까지 초대한다.
권선미 선생님께서는 위 예시글을 쓰시면서, 위와 같은 서사 개념(생략, 요약, 장면, 정지)을 의식하지는 않으셨으리라 나는 짐직한다. 하지만 어떤 내용을 자세히 써야 할지, 어떤 내용을 빨리 넘어가야 할지는 고려하셨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니까, 전문적인 서사 개념을 몰라도 얼마든지 글을 잘 쓸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잘 쓴 글을 세밀하게 들여다 보면, 이런 서사 개념을 적절하게 구사했을 수밖에 없다. 위 서사 개념(생략, 요약, 장면, 정지 개념)은 대단히 잘 쓴 글을 수없이 많이 분석해서 만든 개념이니까.
요컨대, 이야기 글을 쓰기 전(이나 후)에, 내가 지금 쓰려는 글 내용 중에서 어느 부분을 독자에게 많이 보여줄지(그 시간에 얼마나 오래 머물지), 그리고 어느 부분을 생략할지(그 시간을 어떻게 건너 뛸지)를 충분히 고려하면서 글 구조/흐름을 설계한다면, 훨씬 더 쉽고 강력하게 독자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2026년 2월 3일
새벽에 이재원 記.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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