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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합니다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0. 4. 27. 09:45728x90반응형
동네 뒷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평소에 다니던 길 말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자는 마음에
20년 동안 안 가보았던 허름한 산동네로 접어들었습니다.
서울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은 곳입니다.
주민들이 산비탈에 조그마한 텃밭을 가꾸는 모습과
투박한 시골길을 연상시키는 울퉁불퉁 흙길,
그리고 '빨개 벗고' 정신 없이 놀고 있는 아이들까지.
그런데 조금 더 내려오니
치열한 투쟁 끝에 주민들은 온데 간데 없고
집들만 덩그러니 남아 철거를 기다리는 골목이 나옵니다.
삭막합니다.
골목 벽엔 지우다 만 문신 자국처럼 흉측한 안내문이 있습니다.
건설회사에서 주민들에게 알리는(사실은 겁주고 속이는) 글입니다.
그곳을 빠져나오기 직전,
수줍게 마주보며 사랑을 고백하는 벽화 한 쌍을 만났습니다.
이분들, 수줍어서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당신, 내 마음 알죠? 이 꽃을 받아 주세요. 사랑합니다."
"당신도 내 마음 알죠? 사랑해 줘서 고맙습니다."
서로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쏟아지는 비 사이에도 맑은 하늘이 보이듯,
삭막하기 이를데 없는 철거촌에도
이런 빛나는 커플이 살고 있었네요.
잘은 몰라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도 아마 저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살기 힘들지만 그래도 수줍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이었겠지 생각합니다.
벽화 속 두 분,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사시길 바랍니다.
그대들을 닮은 그 꽃처럼요.
(2007년 9월, 약수터에서 내려오던 중에 이재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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