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와 태아를 도와 주고 싶었어

 

<산부인과 병동>

장겨울: 이 환자 분, 잘 하면 성공할 수도 있겠는데요?
추민하: (마우스를 스크롤해서 한 차트 안 다른 기록을 보여 준다.)
장겨울: 음... 이 분은, 조금 힘들겠다.
추민하: 뭐 이상한 거 없어요?
장겨울: 있어요! 챠트를 이렇게 쓰면 어떡해요?
추민하: (한숨을 쉰다.)
장겨울: 다른 산모를 한 챠트에 쓰면 어떡해요?
추민하: 같은 산모에요. 산모도 같고, 날짜도 같고, 전공의도 같고, 교수님만 바뀌었는데, 챠팅이 몇 시간 만에 완전히 바뀌었어요.

<양석형 교수 연구실>

추민하: 교수님은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하실 수 있으세요? 누가 봐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낮은 확률 쪽을 선택하실 수 있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양석형: 음... 난 그냥, 산모와 태아를 도와 주고 싶었어. 산모가 마른 편이니까, 태동도 빨리 느끼셨을 거야. 태동을 느낀다는 건, 태아도 의지를 보여준 거라고 생각해. 산모의 의지가 강하고, 태아의 의지도 느껴진다면, 확률이 낮더라도 지금 상황에서 두 사람을 도와 주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해.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 제 1화 중에서>

---

임신 19주, 그러니까 임신 5개월 차에 불과한 산모가 응급실로 실려왔다. 양수가 너무 일찍 터진 상황인데, 개월 수가 너무 짧아서 아기의 생명도 담보할 수 없고, 산모마저 위험한 상황. 담당 교수는 기존 경험과 확률에 기반해서 산모에게 "마음을 접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산모는 담당 교수님을 바꿔서라도 아기를 살리고 싶다. 인터넷에 보니 양석형 교수라는 의사가 18개월 아기도 살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산부인과 전공의 추민하에게 부탁을 한다: "저도 어려운 부탁인 걸 알지만... 교수님을 바꿔서 양석형 교수님에게 보일 수 있을까요? 제발... 부탁 드려요."

잠시 내 이야기를 하자면, 최근에 아내가 임신을 했다. 기적이다. 왜냐하면 내 나이 47세, 아내 나이 46세, 아이를 갖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볼 수도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2차 시험관을 실패하고 나서, 우리는 서로 드러내 놓고 말은 안했지만 가능성을 대략 접고 있었다. 4번 까지는 해 보자고 합의했지만, 가능성을 20% 아래로 잡고 있었다. 설사 임신이 된다고 한들, 여러 모로 볼 때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다. 하지만 기적처럼 아기가 찾아왔고, 우리 부부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니까! 나는 저 산모 마음이 너무나 잘 이해가 된다.

다시 드라마 이야기로 돌아가면, 다행히 담당 교수가 허락을 해서(아마도 다른 의사가 맡아서 치료한다고 해도 확률 자체가 낮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이 산모를 양석형 교수가 맡게 되었다. 산모가 응급실을 통해서 입원했을 때도, 산모를 이전에 담당했던 교수가 아이를 살릴 수 없을 것 같다고 선언했을 때도 바로 옆에 있었던 추민하. 챠팅(의무 기록)을 하면서 대단히 부정적으로 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아이는 죽을 거다", 라는 식으로. 그런데 산모에게 "가능성이 0은 아니니, 한 번 최선을 다 해 보자"고 말하는 양석형 교수 말을 듣고 난 후 이 산모에 대해서 전혀 다른 (긍정적인) 버전으로 챠팅을 한다.

추민하와 친한 장겨울 전공의가 산부인과에 찾아와 힘들게 일하는 추민하 선생을 격려하다가 그 산모에 대해서 쓴, 대단히 상반된 의무 기록 두 건을 본다. 그러자 당연히, "왜 이렇게 이상하게 챠팅을 했나요? 왜 서로 다른 두 산모에 관한 기록을 한 챠트에 적었나요?"라고 질문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추민하가 적은 두 기록은 동일한 산모에 적었던 게 분명하다. 잘못 기록한 게 전혀 아니다. 다만, 동일한 산모에 대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관점에서 기록했을 뿐이다. 추민하가 말한다: "산모도 같고, 날짜도 같고, 전공의도 같고, 교수님만 바뀌었는데, 챠팅이 몇 시간 만에 완전히 바뀌었어요."

결국, 교수님이 바뀌니 모든 게 바뀌었다는 말. 그래서 양석형 교수에게 묻는다: "누가 봐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낮은 확률 쪽을 선택하실 수 있어요?" 양석형 교수, 담담하게 답한다: "난 그냥, 산모와 태아를 도와 주고 싶었어. 산모의 의지가 강하고, 태아의 의지도 느껴진다면, 확률이 낮더라도 지금 상황에서 두 사람을 도와 주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해." 나는 이 장면을 보다가 일종의 전율감을 느꼈다.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 그대로, "등골이 오싹했다." 왜?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도, 양석형 교수가 한 말이 "해결중심적"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심지어 양석형 교수 태도는 냉정하고 침착하다!

평소, 내가 해결중심모델에 대해서 강의를 하면, 대개 이런 말을 듣는다: "선생님, 이거 듣기에는 좋은데요, 심층적인 문제는 도외시 하는 거 아닐까요? 그리고 이거, 너무 긍정적인 면만 보자는 거 아닌가요? 우리가 배우는 해결중심질문이 유도심문 같아서 약간 불편해요." 솔직히, 난 이런 질문 속에서, 100년 넘게 사람들 머리를 지배해 온 위대한(?!) 프로이트 박사의 그림자가 느껴져서 '그야말로 넌덜머리가 나지만', 그리하여 프로이트 박사에 대해서 욕부터 시원하게 하고 싶지만, 질문한 학생이 놀랄까봐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답변을 한다.

"이렇게 질문하신 분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합니다. 때로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거든요. 기본적으로는,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해결중심모델은 되도록 긍정적인 면을 보자는 게 맞고, 내담자가 가급적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질문하는 게 맞고, 따라서 유도 심문이라는 지적도 맞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반문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 박사 이래로 우리가 생각해 온 대로,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면, 문제, 약점, 결함을 파헤치면 뭔가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던가요? 도대체 문제가 왜 생긴 건지, 그 이유를 알면 해결이 잘 되던가요?"

보통은 이렇게 다소 감정 섞인 반문을 던졌다. 하지만 양석형 교수 말을 곱씹어 보면서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어졌다: "우리는 돕는 겁니다.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이 가진 삶에 대한 의지를 돕는 겁니다. 우리가 다 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을 그가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할 수 있도록 돕는 겁니다. 삶이 고통스러워서 죽겠다고 (작은 목소리라도) 소리치는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진짜 죽으려는 사람은 조용히 혼자 사라집니다. 아무리 작은 외침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내담자에게 목소리가 남아 있다면, 그 목소리가 세상에 울리도록 돕는 겁니다."

추민하에게 상황을 산모/아기 상태에 대해서 보고받은 양석형 교수가 가장 먼저 물어본 질문: "산모 체형이 말랐다고 했나?" 왜? 양석형 교수 말에 따르면, "마른 산모는 태동을 빨리 느꼈을 거고, 그래서 아기에 대해서 애착이 생겼을 거고, 그래서 살려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거야. 그리고 아기도 그렇게 태동을 보인 것은 (비록 아주 작지만) 살겠다는 의지를 보인 거지." 양석형 교수가 확인한 것은, 산모와 아기가 가진 '작은 의지'였다. 그리고 그 의지를 근거 삼아 자신이 줄 수 있는 도움을 최대한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주도적으로 치료하겠다"가 아니라 "그분들을 거들고 도와야겠다"고 결심했다.

해결중심모델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나는 "이미"라고 단어로 요약한다. 해결중심모델은 "발명"이 아니다. 없던 힘을 내가 불어넣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발견"이다. "이미"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힘을 나는 그냥 "발견"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도 자신의 힘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산모와 태아를 도와 주고 싶었어."

<좀 더 많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아래 박스 링크를 클릭해 주세요!>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배우는 원조전문가의 태도(목차)

---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강의/자문/상담 문의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010-8773-3989 / jaewonrhi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