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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으로 그럴 때 내 전화는 안 받아도 돼
    지식 공유하기(기타)/슬기로운 의사생활 2021. 6. 2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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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부인과 치료실>

     

    산모: (드레싱을 받으려고 누워 있는 산모) 하아... 

    추민하: (상냥한 목소리로) 아이고... 쓰리시죠? 살살 할게요, 거의 다 됐습니다. 

    산모: 네... 근데 선생님, 이거 몇 번이나 더 해야 해요? 이 자세는 해도 해도, 적응이 안되네요. 

    추민하: (양석형 교수에게서 전화가 오자 드레싱을 중단하며 산모에게) 죄송합니다. (전화를 받고) 네, 교수님. 

    양석형: (전화로) 프리미(초산모) 12주 산모인데, 이분 입덧이 너무 심하고, 체중감소가 너무 심해서 일단 입원하라고 했거든. 

    추민하: 음... 

    간호사: 선생님, 그레싱 세트, 새로 드릴게요. 

    추민하: (간호사 올려다 보며) 네, 감사합니다. (다시 전화) 네, 교수님 필요한 랩 나가고 수액 타면 될까요? 

    양석형: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추민하: 네? 

    양석형: 드레싱 중이니? 

    추민하: 어, 네. 

    양석형: 마무리 하고, 다시 전화해. (끊는다.)

    추민하: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불편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산모를 바라본다.) 

    산모: (말없이 추민하 바라본다.)

    추민하: (이제 알았다는 표정으로 사과한다.) 아... 죄송합니다. 

     

    <치료실 복도> 

     

    추민하: 죄송합니다. 

    양석형: 그런 상황이면 전화기 다른 사람에게 넘겨. 환자 엄청 불편하지 않겠어? 

    추민하: 네. 죄송합니다. 

    양석형: 물론, 교수 전화라 급하게 받은 거 아는데, 앞으로 그럴 때, 내 전화는 안 받아도 돼. 끝나고 다시 전화하면 되잖아. 

    추민하: 맞아요. 

    양석형: 한 번은 그럴 수도 있어. 근데, 두 번은 안된다. 

    추민하: 네. 

    양석형: 간다. 

    추민하: 네. (머리를 숙인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 제 1화 중에서>


    <한겨레 신문 기사: "다리 벌리고 무작정 기다려... 산부인과 악몽">

     

    다리 벌리고 무작정 기다려…산부인과 ‘악몽’

    여성이 불편한 산부인과 다리 벌리고 앉는 진료의자 여성 다수가 ‘거북하다’ 반응 속옷 벗고 무작정 기다리기 말없이 시작된 의사의 진료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웠다”

    www.hani.co.kr

    산부님과 치료실, '분만 의자' 위에 산모가 누워 있다. 뭔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때 산부인과 전공의, 추민하가 말한다: "아이구 쓰리시죠?" 드레싱(소독: 환부에 멸균처리된 거즈나 붕대를 대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자 산모가 말을 잇는다: "근데 선생님, 이거 몇 번이나 더 해야 해요? 이 자세는 해도 해도, 적응이 안되네요."

     

    이 자세? 어떤 자세? 남자들은 잘 모를 "이 자세"란, 분만 의자라고 불리는, 산부인과 전용 의자에 앉는 자세를 일컫는다. 의사에게 환부를 잘 보이기 위해서 하체는 다리를 벌리고 상체만 눕는 거다. 말이 '의자'이지, 거의 눕는 침대에 가깝다. 상상만 해도 불편함이 전해진다. 게다가 상대가 아무리 의사 선생님이라도, 여성 의사라도 민망할 것 같다. 

     

    그런데 산부인과 양석형 교수가 추민하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당연히'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전화를 받는다. 이런 저런 업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추민하가 간호사와 대화를 하고, 이를 들은 양석형 교수가 묻는다: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그리고는 전화를 끊고 하던 거 마무리지은 후에 다시 통화하자고 말한다. '뭐지?' 라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한 추민하. 

     

    헌데, 화면 앵글이 클로즈업에서 풀 샷으로 바뀌자 바로 이해가 된다. (감독의 시각적 연출력이 좋았다.) 산모가, 대단히 불편한 자세에서 전공의가 전화를 끊고 시술을 계속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 뭐하니?' 라는 표정으로 지그시 추민하를 바라보는 산모. 그제서야 추민하도 상황을 파악하고 사과를 한다: "아~ 죄송합니다."

     

    장면이 바뀌어서 추민하가 양석형 교수에게 혼나고 있다. 추민하의 행동에 대해서 가볍게(?) 책망하는 양석형 교수: "그런 상황이면 전화기 다른 사람에게 넘겨. 환자 엄청 불편하지 않겠어?" 양석형 교수 말대로, 산모에게 엄청 불편감을 주는 이 분만 의자는 18세기 중반 이후, 근대 의술이 발전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게 왜 불편하냐면, 완전히 의사 위주로, 즉 의사가 산모를 최대한 편하게 잘 볼 수 있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산모는 다리를 크게 벌린 채로, 즉 대단히 민망한 자세로 누워 있다. 양석형 교수는 추민하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환자(산모)가 느꼈을 불편함을 추민하도 공감하면 좋겠다는 취지로 주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자. 의사 위주로 설계된 분만 의자는, 근대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결과물이다. 근대의 기초는 과학주의이다. 근대는 이성으로 인식한 객관적인 사실을 다루는 과학이 최고인 시대이다. 과학이 최고이니 과학자가 최고로 대접받는다. 의사는 과학자 중 한 부류. 의사는 사람들의 신체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는) 과학자다. 인간 신체에 관해서 배타적인 지식 체계를 보유한다. 의사의 권위는 바로 지식에서 나온다. 그래서 의사는 힘이 있고, 의사가 의료 행위를 하게 되면 의사 위주로 하게 된다. 요컨대, 의사는 현미경을 들여다 보는 과학자이고, 환자(산모)는 의사가 관찰하는 대상물이 된다. 결국, 양석형이 추민하에게 책망하는 지점은, "네가 뭔데, 산모를 그렇게 쉽게 대상화했느냐? 산모는 물건이 아니다. 산모를 인간으로 대하라"가 된다.


    여기에서 잠깐 내 이야기를 하자면, 수년 전 추석날 오전 자전거를 타고 한강 둔치를 누비다가 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실려간 적이 있었다. 오른쪽 쇄골 골절. 쇄골 끝이 으스러졌단다. 내가 실려갔던 병원이 유명한 대학병원이라서 그냥 그곳에서 수술을 받기로 했는데, 어깨 수술 전문의 선생님 일정 때문에 1주일을 기다리라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아뿔싸... 그런데 주로 쓰는 쪽 팔과 어깨를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 주일을 혼자 생활하려고 하니 불편함,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속옷 갈아 입는데 한시간이 족히 걸렸고, 샤워를 하려니 그보다 더욱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때까 추석 시즌이었으니 낮에는 햇빛이 강하고 꽤 더웠는데... 정말 환장(?)하는 줄 알았다. 

     

    시간이 흘러, 일 주일만에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실은 뭔가 온도가 낮아서 준비실부터 오싹했다. 휠체어에 탄 채 대기실에 있었는데, 갑자기 누가 와서(아마도 마취과 의사와 간호사?) 수술 동의서에 싸인을 해 달라고 한다. 어쨌든, 몸에 칼을 대는 수술이고, 잘 안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확인하는 거다. 그래도 수술이라고 잘못될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더욱 오싹했다. 

     

    그런데 수술실로 들어갔더니 거긴 더욱 오싹했다. 휠체어에서 내려서 수술대 위로 올라갔다. 차가운 침상이 느껴졌고, (안경을 벗어서) 내 주변에 모여서 작업(?) 준비를 하는 전문가들 말이 한동안 오고 갔다. 아마도 수술 전에 준비하면서 모든 사항에 대해서 체크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서 수술 집도의 선생님께서 나즈막하게 기도를 하셨고(가톨릭 신자), 시야가 서서히 희미해졌다(마취제를 주사했나보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도할 때를 제외하면, 나를 그냥 짐짝 취급하시는군요."

     

    나는 기분이 어땠을까?

     

    양석형 교수 관점과는 약간 다르게, 나는 기분이 좋았다. 특히, 의료진이 나를 짐짝 취급하는 부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나를 짐짝 취급한다는 것은 나를 대상화한다는 뜻이고, 나를 대상화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개입 없이 마치 숙련된 장인이 고장난 태엽시계를 고치듯, 최대한 효율적이고 능숙하게 자신이 가진 기술을 나에게 쏟아 붇는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치료 프로페셔널에게 맡겨진 대상이었고, 이 사람들은 고도로 숙련된 기술을 나에게 베풀 것이었다. 감정 없이, 최대한 실력을 발휘하는 의료진이 좋았던 셈이다. 그 프로페셔널리즘을 신뢰할 수 있었단 말이다.


    다시, 양석형 교수와 추민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양석형 교수의 말은 환자들이 듣기에 참말로 인간적으로 들린다. 나도 기본적으로는 양석형 교수의 관점과 태도에 가까운 것 같다. 아니, 의사가 환자를 '인간으로' 대접하겠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이번 이야기 속 상황은, 다소 민망한(?!) 자세로 누워 있는 산모와 관련되어 있다. 당연히, 기본적으로는 양석형 교수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추민하도 양석형 못지 않게 지지하고 싶다. 자기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는 그녀를 지지하고 싶다. 산모를 물건처럼 대한 점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일에 몰입해 있는 전문가적 태도를 지지한다. 

     

    내가 공부하고, 가르치는 해결중심모델은 전문가가 최대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내담자를 상담의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시종일관 애를 쓰는 상담 모델이다. 해결중심모델에서는 질문 기술이 주된 기술인데, 내담자에게 질문하는 행위 자체에 내담자를 존중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즉, 해결중심 실천가는 내담자가 원하는 바나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강점과 자원을 묻는데, 이는 그가 원하는 바, 강점, 자원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고, 내담자야말로 자신의 문제와 해결책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 라는 가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내담자가 신은 아니다. 아니,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문제나 강점/자원에 대해서 전혀 모를 수도 있고, 진상을 부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비열한 언행을 일삼을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가치를 실천할 때에는 유연성을 필수적으로 더불어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부디 오해 마시라. 나는 양석형 교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의 태도와 관점을 우선적으로 지지한다. 사람이 먼저고 우선이다. 다만, 세상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바라보지는 말자. 세상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런 상황이면 전화기 다른 사람에게 넘겨. 환자 엄청 불편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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