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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1. 11. 13. 08:49728x90반응형
깊고 푸른 밤
고등학교 시절 영어 문법책을 공부하다가 명사 앞에 나오는 수식어(주로 형용사)가 여러 개일 경우, 순서를 정하는 규칙을 봤던 기억이 난다. 그 규칙, 무척 복잡했다: 수량, 가치(의견), 크기, 나이, 온도, 모양, 색채, 기원(국적), 재료 이런 순서로 써야 한단다. 영어는 명사가 발달한 언어이기 때문에 형용사가 명사 앞에 나와 수식할 때가 많다. 그런데 형용사가 많이 나오면 그 사이에 무엇부터 써야 할지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교통정리를 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복잡한' 규칙이 필요하다.
우리말은 어떨까? 일단, 우리 말은 체언(명사, 대명사)보다는 용언(동사, 형용사)이 발달한 언어다. 그래서 영어에 비해서 수식어구가 명사 앞에 나오는 경우가 비교적 적다.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쓰려면, 수식어구를 동사나 형용사로 만들어서 술어로 쓰는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우리말에서도 어쨌든 명사 앞에 수식어구(형용사와 관형사)를 써야 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어떤 순서로 낱말을 늘어 놓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배창호 감독이 만든 영화, '깊고 푸른 밤'을 들고 왔다. 1984년 개봉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 남자(안성기 분)는 미국 시민권을 따기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을 죽이고 만다. 한국인이 품고 있던 아메리칸 드림이 얼마나 허망한지 잘 보여준 흥행작이다. 제목을 뜯어 보면 형용사 '깊은'이 먼저 나온다. 한국어 어법 서적에 따르면, 우리말에서는 규모를 나타내는 명사 수식어구가 제일 먼저 나와야 자연스럽다고 한다. (규모에는 길이, 넓이, 높이, 깊이가 해당됨.)
그 다음에는 모양이나 특성을 나타내는 수식어구(형용사와 관형사)가 나온다. 예컨대, '덜컹거리고 큰 트럭' 보다는, '크고 덜컹거리는 트럭'이 좀 더 자연스럽고, '뚱뚱하고 작은 아저씨'보다는 '작고 뚱뚱한 아저씨'가 좀 더 자연스럽다. 규모를 나타내는 수식어구와 모양이나 특성을 나타내는 수식어구 뒤에는 색깔을 나타내는 단어가 나온다. '깊고 푸른 밤'을 봐도 색깔이 앞으로 나간 '푸르고 깊은 밤'보다 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색깔을 나타내는 수식어구 뒤에는 명사가 오고, 그 다음에는 수량 관련 표현이 나온다.
명사 뒤에 수량 관련 표현이 나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우리 말에서는 명사 앞에 수량을 나타내는 표현이 나오면 부자연스럽다. 영어로는 'two dogs'가 맞지만, 우리말로는 '두 개'나 '두 마리의 개'보다는 '개 두 마리'가 좀 더 자연스럽다. 왜? 우리말에서는 수량보다 사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왜? 그냥 그렇다. 말하자면, 한국 사람들은 명사를 사용할 때 미국 사람들처럼 숫자에 목을 매지는 않는다. (도대체 왜? 영어에서는 그렇게 숫자에 목을 매는지 - 심지어 '하나'라는 뜻을 가진 관사가 단수 가산명사 앞에 나오지 않으면 영어가 무너진다!)
정리해 보자. 우리 말에서 명사 앞에 나오는 수식어구(형용사, 관형사)는 대략 이런 순서로 전개된다.
(1) 규모를 나타내는 말
(2) 모양, 특성을 나타내는 말
(3) 색깔을 나타내는 말
(4) 명사
(5) 숫자를 나타내는 말
(예시)
_ 크고 깡마른 사내 세 명
_ 높고 푸른 하늘
_ 깊고 맑은 강
_ 작고 예쁜 파랑새 두 마리
마지막에 든 예시, "작고 예쁜 파랑새 두 마리"를 외우면 좋겠다. '규모 - 모양/특성 - 색깔 - 명사 - 숫자' 라는 규칙이 모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어? 파랑새가 아니라 파란 새라고 써야 하지 않나? 이런 의문을 가지셨다면, 그대는 언어적 감각이 엄청나게 발달하신 분이다. 왜 '파란 새'라고 쓰지 않았을까? 우리말에 이미 '파랑새'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파랑새' 라는 단어에는 매우 중요한 우리말 특성이 담겨 있다: (우리말에서) 색과 사물을 둘이 아니다.
우리 말에는 특별히 색깔을 나타내는 수식어구와 명사가 결합된 합성어가 많다: 빨강구두, 흰둥이, 검정콩, 검정고무신, 노랑나비. 전문가에 따르면, 우리말에서는 색깔을 사물에서 따로 떼어 낸 특성으로 보지 않고, 원래부터 사물에 내재된/고정된 개념으로 본다. 수식어구란 사물에 덧붙여진 특성을 가리키는 말인데, 우리말에서는 적어도 색깔에 관해서는, 사물에 추가적으로 덧붙일 필요 없이 원래부터 사물에 붙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아예 색깔과 사물을 합친 말이 많다는 설명.
기억하시라!
깊고 푸른 밤,
그리고 작고 예쁜 파랑새 두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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