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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한 살에 설빔을 받았습니다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3. 1. 25. 12:16728x90반응형
쉰 한 살에 설빔을 받았습니다
정현주
제가 사는 동네에 몇 해 전 인연을 맺은 어르신 내외가 계십니다. 매번 명절 때면 이웃 어르신인 두 분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번에도 시골을 다녀와서 명절 마지막 날에 설 인사를 드리러 찾아 뵈었습니다. 자식들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두 분만 계셨지요. 사모님께서 "우리 해담이 뭐 줄까? 해담이는 시원한 걸 좋아하는데.." 하시며 한과와 냉동실에서 방금 꺼낸 곶감을 내오셨습니다.딸아이가 곶감을 사각사각 소리 내며 먹습니다. 남편에게는 이번 설날에 선물받은 커피를 한잔 내려주셨지요. 그 사이 남편은 올해 여든셋 되신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지난해 어르신 일생을 기록한 소설 '고난이 은총이었네'를 단번에 읽었다며, 남편이 어르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물어보더군요.
"참 힘들었어요. 어디든 출구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때 집사람을 야학에서 만났지요. 나는 선생으로, 집사람은 학생으로. 집사람한테 편지를 많이 썼더라구요. 얼마전에 집사람이 그걸 모두 가지고 있어서 다시 읽어보았지요. 많이 썼더라구. 200자 원고지에 2,000장이 훌쩍 넘어요." 라고 말씀하시며 허허 웃으셨습니다. 저는 아무말 없이 옆에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작은 방으로 들어가신 사모님께서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패딩 조끼를 꺼내오셨습니다. "옷 살 때 해담이 엄마 생각나서 하나 더 샀어요. 95인데 남녀 공용이라 두분 중에 맞는 분이 입으시면 좋겠어요."하셨습니다. "우와~ 선생님 감사합니다. 어릴 적 설빔 받는 기분이예요." 곁에 있던 남편이 "따뜻하겠는걸요"라며 옷을 바라보는 눈빛에 욕심이 느껴집니다.
인사를 드리고 아파트 계단을 내려오며 제가 남편에게 "당신한테는 조금 작을 것 같아요." 했더니 "그런가?" 라며 머리를 긁적입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패딩 조끼를 입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들여다보는 남편! 귀엽다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아무래도 조금 작네. 당신이 입어야겠어."말하는 남편. 제 나이 오십 한 살에 동네 어르신에게 따뜻한 설빔을 선물받았습니다.
영하로 뚝 떨어진 날씨와 칼바람에도 제가 사는 송내동은 따뜻하기만 합니다.
나는 매주 한 번씩 이메일 뉴스레터, Solutionists를 제작해서 발송한다. 해결중심상담과 강점관점실천에 관심이 많은 구독자 약 500명에게 보낸다. 주로 내가 블로그에 쓰는 다소 전문적인 글을 공유하는데, 그러면 구독자가 딱딱하게 느낄까봐 그리 짧지 않게 가벼운 글을 발문 삼아 써서 앞에 붙인다. 헌데 가끔씩, 그렇게 붙이는 발문 내용에 반응해서 답장을 보내 주시는 분이 계신다. 부천 송내동에 살고 계시며,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에서 일하고 계시는 정현주 선생님처럼.
[이재원] 정현주 선생님, 안녕하세요? 임상 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 답장으로 보내 주신 이메일 읽고서, 너무 글을 잘 쓰셔서 놀랐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서 톡 드립니다. 그런데, "지난해 어르신 일생을 기록한 소설 '고난이 은총이었네'를 단번에 읽었다며" 라고 쓰셨는데, 그 어르신께서 소설 주인공이셨다는 말씀인가요?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보내 주신 이메일을 저 혼자만 읽기에는 너무 아까워서요, 혹시 허락을 해 주시면,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선생님을 자랑하고 싶네요.)
[정현주] 네, 좋습니다. 영광입니다. 그리고 서툰 글을 지나치게 칭찬해 주셨네요. 선생님 보내주시는 뉴스레터,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잘 읽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이웃 어르신은 소설가 강정규 선생님이십니다.
[이재원] 감사합니다! 그럼 본문을 원문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Solutionists를 꾸준히 발송하다 보니, 이런 행운도 얻네요.) 선생님 글이 정말로 좋습니다. (보통 사람 글은 아닌 것 같아요.) 혹시 글쓰기와 관련된 공부를 하셨나요? 보통 글빨이 아닙니다.
[정현주] 별도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몇 년 전부터 글쓰기에 관심이 생겼지요. 요즘은 딸아이와 장편동화를 아침, 저녁으로 읽고 있습니다. 오늘 선생님 칭찬을 들으니 발이 시릴 만큼 매서운 추위가 확 녹아드는 듯합니다. 감사한 하루 선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재원] 안 좋은 버릇이 거의 없어서 놀랐습니다. 일부분만 읽어봐도 딱 알 수 있는데, 선생님 글은 일단 오염이 거의 안 된 청정지역 같습니다. 알고 보니 동화를 많이 읽으셔서 그렇군요? 동화는 쉽고 고운 우리말로 쓰잖아요. 역시 어린이가 우리 스승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 칭찬이라는 말보다는 인정, 이 맞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말씀 드렸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글을 쓰셔야 하는 분 같아요.
[정현주] 하하하! 오늘 퇴근해서 남편과 아이에게 자랑을 해야겠습니다~
[이재원] 진심입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글을 더 읽고 싶어졌습니다. 저도 아내에게 자랑하겠습니다. 뉴스레터 보내는 좋은 이유를 또 하나 찾았다고요. (이젠, 답글 쓰지 말아 주세요. 시간을 뺏는 듯 싶어 죄송합니다.)
허허~ 이래서 글 잘 쓴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정현주 선생님을 포함해서, 세상엔 글 잘 쓰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소박하고 겸손하셔서 앞에 나서지 않고 계시지만, 이렇게나 글을 잘 쓰시는 고수도 계시지 않나. 새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 라고 다시금 내 자신에게 물어본다. 솔직한 글, 쉬운 글, 깊은 글. 내가 흔들림없이 확신하는 세 가지 조건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지만 초야(?)에 묻힌 채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보석을 찾고 싶다. 남 앞에서 으스대기 위해서가 전혀 아니라, 맑은 영혼 속에 기르고 있는 온갖 아름다운 물고기를 세상과 공유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50주 동안 이어질 강점관점실천 공부 자료 나눔 프로젝트>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강의/자문/상담 문의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010-8773-3989 / jaewonrhie@gmail.com)'지식 공유하기(기타) > 글쓰기 공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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