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혜주씨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3. 2. 22. 07:39
    728x90
    반응형

    사회복지사 동료들과 함께 글짓기를 배우고, 글을 쓰고, 고쳐 드리고, 나누면서 여러 모로 생각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생각: 사회복지사가 쓰는 글은 사회복지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만을 담아내서는 안 된다. 클라이언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클라이언트를 ‘당사자’라고 그럴싸하게 번역만 하지 말고, 그에게 진짜로 마이크를 쥐어 주고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권송미 사랑누리장애인단기보호센터 원장님께서 쓰신 글을 첨삭지도하면서 평소 생각을 적용해 보았다. 원장님께서는 내가 지도해 드리는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시고, 풍부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멋지게 글을 써 내셨다.


    제목: 혜주씨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글쓴이: 권송미(2023)
    첨삭 지도: 이재원(2023)

    제 1편: 아무개 손님 시선(비장애인)

    커피숍엔 사람이 가득하여 빈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모두 무더위를 피해 이곳으로 모였나 보다. 화장실로 가는 길목에 남은 자리를 겨우 잡았다. ‘화장실에 번호키가 설치되어 있으니 여기 화장실은 그나마 깨끗하겠네.’ 화장실 비밀번호 팻말이 붙은 벽 옆에 앉아 주문한 커피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떤 여성이 내 자리 근처를 서성인다. 화장실 비밀번호 때문인 것 같은데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진 못한다. 자연스레 이 여성을 관찰하게 되었다. “9, 9, 6... 뭐였더라. 아~ 다시, 9969 아니, 아니 996399...” 혼자서 중얼거리며 계속 왔다리 갔다리 한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니 피식, 웃게 된다. ‘아니, 앞뒤 99에 가운데 63인데 뭐가 어렵다고 저렇게까지 열심히 외우는 거지?’
    여성은 다시 와서 번호 외우고 가는 행동을 거듭하더니만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 든다. 그리고 의기양양 돌아섰다. 아무래도 저분은 장애인인가? 생각했다. 잠시 후 카페 한쪽이 소란했다. 그 여자분이 화장실 다녀왔다고 이야기하는데 화장실 한번 다녀온 일이 뭐라고 칭찬하고 손뼉을 치고 시끌벅적 요란하다.

    제 2편: 혜주씨 시선(장애인 당사자)

    오늘은 신나는 월급날이다. 월급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언니랑 새 옷을 사기 위해 한참을 걸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시원한 커피가 먹고 싶어졌다. 사람이 많은 커피숍은 에어컨 바람이 시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 라테는 오늘따라 더 맛있다.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 화장실을 찾아갔다. 화장실은 밖에 있었다. 문이 잠겨 똑똑똑 해도 아무도 안 나왔다. “저기요. 화장실 문이 잠겨 있어요. 열어주세요.” 라고 직원에게 말했다. “저기 비번 있어요” 커피숍 직원은 대충 손으로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화장실 그림과 숫자가 있었다.
    어떡하지? 숫자가 많다. “996399 누르고 별표. 다시 996 아! 뭐였더라” 숫자가 너무 많아서 번호키를 누르다가 잊어버렸다. 다시 벽으로 돌아와 번호를 보고 또 가서 번호키를 눌렀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했지만, 화장실 문은 열리지 않고 삐삐삐하는 소리만 났다. 점점 급해지는 소변을 참으며 번호를 보러 다시 갔을 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맞다! 사진!!” 이번에는 핸드폰으로 비밀번호를 촬영했다. 화장실 문 앞에서 사진을 보고 하나씩 하나씩 번호를 눌렀다. “996399 별표” 따르릉 소리와 함께 문을 열 수 있었다. “아~ 쌀 뻔했네.”

    제 3편: 권송미 시선(사회복지사이자 가족)

    카톡! 시누이 혜주 씨가 “돈”, “옷” 이렇게 한 글자 메세지를 내게 보내 왔다. 월급 탔으니 옷을 사러 가잔다. 혜주 씨는 지적장애가 있다. 말은 잘 하는 편인데, 읽기나 쓰기는 어려워한다. 그래도 꾸준히 연습해서 스마트폰으로 서툴게라도 표현하니 참으로 대견하다.
    쇼핑을 마치고 카페에 들러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문득 혜주씨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혜주씨는 평소 혼자서 화장실에 잘 다녀오기 때문에 마음 편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혜주씨가 다른 날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마치 시계추처럼,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왔다가,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혜주 씨. 무슨 일 있어요?”

    “언니. 나 바지에 쉬할 뻔했어.”

    “화장실을 못 찾았으면 자리로 돌아오지. 그럼 도와줬을 텐데.”

    “여자·남자 그림 있으니깐 화장실은 금방 찾았지. 그런 문이 잠겨져 있었어. 다른 사람 지나가면 그때 들어가려 했는데, 사람은 오지 않고 나는 기다렸어. 내가 내가 그래서 저기 저 언니한테 비밀번호 물어봤는데, 저 언니가 화장실 모양 그림에 (적혀) 있다고 했지. 가서 봤는데 숫자가 너무 많았어.”

    “아이코, 그럼 혜주 아가씨 힘들었겠네요. 숫자 많은데 어떻게 했어요?"

    “내가 내가 했는데, 자꾸 틀려서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다가 사진이 생각났어, 사진 찍어서 번호 보고 눌러서 문 열고 화장실 다녀왔어. 내가 내가 진짜 잘 했지?”


    지적장애인은 4자리 비밀번호까지는 외우거나 보고 누를 수 있지만, 6~7자리 번호는 어려워한다. 비장애인에게는 너무 쉬운 6자리 비밀번호가 지적장애인에게는 넘기 힘든 사회적 장벽이 될 수도 있다. 순식간에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을 수 있다. 그런데 혜주씨는 스스로 사진을 찍어서 사회적 불편을 훌쩍 넘어섰다. 정말 대단하다. 앞으로도 혜주씨가 용기를 내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더욱 크게 환호하고 박수치며 응원한다. 으쌰! (끝)


    권송미 원장님께서 한 가지 사건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쓰신 글, 어떻게 느끼셨는가? 그냥 시점만 바꿔서 서술했을 뿐인데, 이렇게도 다르다. 그렇다. 원장님께서는 세 사람이 느끼고 생각한 궤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 섬세하면서도 입체적으로 그려내셨다. 장애인 당사자와 비장애인 시선까지 두루 배려하며 솔직하게 살려 내셨다. 대단히 잘 쓰셨다.

    나는 글쓰기를 ‘해방(Emancipation)’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나는 글을 쓰면서 해묵은 감정을 해방시키고, 맺혀 있는 생각을 해방시켜서, 내 존재 자체를 해방시킨다. 이렇게 억압받고 있던 영혼이 해방되려면 무엇보다도 제 목소리를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누구의 목소리를, 얼만큼 담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목소리가 없는 글은 힘이 없다.

    사회복지사가 글을 쓸 때, 너무 진지하게 가치나 윤리를 찾는 대신에, 누구의 목소리를, 얼만큼 담을지를 더 많이 고민하면 좋겠다. 누구 목소리가 어떻게 억압받고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고, 바로 그 목소리에게 원래 자리를 돌려주려고 애쓰면 좋겠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직접 전달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목소리가 절절하게 전달한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유영덕과 이재원의 글쓰기 학습 모임,
    '봄나물 돋듯' (준비 중)


    <50주 동안 이어질 강점관점실천 공부 자료 나눔 프로젝트>

     

    50주 동안 이어질 강점관점실천 공부 자료 나눔 프로젝트

    내가 가르친 뛰어난 사회사업가께서 들려 주신 이야기: "제가 돕는 청소년이 너무 기특한 행동을 하기에, 저나 제 동료들이나 아주 자연스럽게 물어보게 되었어요. '우와~ 너 어떻게 이렇게 한

    empowering.tistory.com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강의/자문/상담 문의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010-8773-3989 / jaewonrhie@gmail.com)

    '지식 공유하기(기타) > 글쓰기 공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두방_정_이진  (0) 2023.02.24
    유튜버 아내와 함께 연 하우스 콘서트  (0) 2023.02.23
    성가정  (0) 2023.02.21
    5월, 어느 날  (0) 2023.02.17
    새롭게 찾아온 봄  (4) 2023.02.15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