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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3. 11. 20. 05:53728x90반응형
전봇대
글쓴이: 김정현(안동성좌원 요양복지과 팀장, 2023)
첨삭 지도: 이재원(강점관점실천연구소, 2023)
오늘도 김씨 할머니는 식판을 싹 비웠다. 네 칸에 조금씩 묻어 있는 양념 자국을 보면 어떤 반찬을 드셨는지 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씨 할머니는 지병(한센병) 때문에 시각 장애를 갖게 되었고 왼쪽 손가락을 모두 절단했다. 오른쪽 손가락도 오그라들어 모두 자유롭지 않다. 겨우 손가락 끝 한 마디 정도씩만 조금 움직일 수 있다. 식판을 갖다 드리면 손가락 사이에 포크를 끼워서 반찬을 밥그릇 자리로 긁어 모은다. 포크 끝을 세워 식판 여기저기를 쿡쿡 찍어서 끝에 닿는 느낌이 있으면 밥그릇으로 옮긴다. 반찬을 거의 다 모은 후에는 식판 모서리에 입을 대고 밥과 반찬을 흡입(?)한다. 할머니는 앞이 안 보여서 밥을 늦게 먹는다는 핀잔을 들을까봐 허겁지겁 식사하는 버릇이 몸에 배어 버렸다. 밥과 반찬을 한꺼번에 드시고 나면 바로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시고 남은 건더기는 역시 포크로 긁어서 입에 몰아 넣는다.
급하게 먹느라 음식을 많이 씹지 않고 대충 삼킨다. 그래서 이 사이에 찌꺼기도 많이 낀다. 식판을 물리자마자 양치질을 하시지만 완벽하게 빠지지 않는다. 손가락이 불편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이쑤시개는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던가. 할머니에겐 전용 이쑤시개가 있다. 이름하여 ‘전봇대’.
처음 요양실로 부서를 옮겨서 식사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김씨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어이 김 선상, 내 전봇대 좀 꺼내줘.”
머리맡에는 2단짜리 작은 서랍밖에 없는데 5m가 넘는 전봇대를 어떻게 넣었길래 꺼내달란 말인가. 잘못 들었는가 싶어 다시 물어 봤지만 전봇대가 맞다고 하신다. 내가 어쩔 줄 몰라하니 깔깔깔 웃으신다. 눈물까지 찍어내며 한참 웃으시더니 서랍에 나무젓가락 비슷한 게 있으면 꺼내 보라 하신다.
서랍 속 물건을 꺼냈다. 나무젓가락 양쪽을 뾰족하게 깎아 놓은 모양이 일반 이쑤시개를 스무 배쯤 확대해 놓은 듯하다.
“이게 왜 전봇대예요?”
“몰라, 옛날부터 그냥 그래 불렀어. 놀랬재?”
“아유, 난 또 요양실 앞에 전봇대 뽑으러 갈라 그랬잖아요. 히히히.”
그 후 나는 할머니의 전봇대 관리를 도맡았다. 입 속에 사용하는 물건이니만큼 깨끗하게 보관하고 자주 새것으로 바꿔드려야 한다. 일부러 끝이 덜 무디어지는 대나무 젓가락을 구해서 전용 칼로 꼼꼼하게 깎는다. 가운데에는 면봉을 두툼하게 둘러서 잡기 쉽게 했다.
“할머니 새 전봇대 왔어요. 써 보세요.”
“좋다. 손에 꼭 맞는다. 김 선상이 챙겨주니 든든하다.”
“전봇대는 얼마든지 만들어 드릴 테니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많이 드세요. 꼭꼭 씹어서요.”
잔소리 시작한다며 나를 쫓아내시면서도 싫지 않으신 듯하다.
한센병력이 있는 어르신은 대체로 오랜 시간 사회와 격리된 채 집단생활을 해 오셨다. 그래서 당신들만의 독특한 정서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특히 “전봇대”와 같이 불편한 손발을 도와줄 신박한(!) 생활도구들이 많다. 어르신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오셨다. 이제 평균 연령 85세가 넘어가시다 보니 많이 약해지시고 병원 입원하는 분도 늘어난다. 앞으로 뵐 날이 많지 않으리라. 그래서 한분 한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어르신들을 모시는 동안 그분들에게 꼭 필요한 “전봇대”가 되고 싶다.
<안내>
_ 본 글은 직접 글을 쓰신 김정현 팀장님께 공식적으로 사용 허락을 받았습니다. (교육 및 출판 목적)
_ 김정현 팀장님께서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글쓰기 클래스 기본반 '글로위로'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이재원 선생 피드백>
1. 아주 잘 쓰셨습니다. 우선, 빨간색 글자가 급격히 줄어들었죠? 그동안 수업 시간에 배우시고, 첨삭지도 받으시면서 배우신 내용을 잊지 않고 소화하시려고 애쓰신 티가 납니다.
2. 내용적으로도 한센인 어르신을 대표하는 김씨 할머니를 효과적으로 내세우셔서, 하나로 전체를 포괄하는 마법을 부리셨습니다.
3. 김정현스러운 개성도 잘 드러납니다. 이야기 세부사항을 잘 살리셨고, 중간에 유머러스한 내용을 넣으셔서 좋습니니다. 대화록도 적절하게 잘 사용하셨습니다.
4. 이 글을 읽으면서, '건강한 폭로' 혹은 '해방'이라는 어구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기본적으로, 사회복지사는 타인을 돕는 일을 합니다. 여기에서 도움을 받는 사람은 대체로 사회적 약자이죠. 그런데 사회복지사가 (자신이 돕는) 사회적 약자에 관해서 글을 쓰면, 당사자 목소리 자체가 아니니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 사회적 약자가 마음 속에 숨겨 둔) 잊혀진 목소리를 사회적으로 건강하게 복원하는 의미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사회복지사는 자신이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5. 어법에 관해서는 딱 하나만 지적하겠습니다.
(a1) 양념 자국을 보면, 어떤 반찬(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a2) 양념 자국을 보면, 어떤 반찬을 드셨는지 짐작할 수 있다.
원문을 보시면 '어떤 반찬이었는지'와 연결된 주어가 '(할머니가 드신) 그 반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략된 주어를 복원해서 문장을 써 보면 이런 형태가 됩니다: 양념 자국을 보면, (할머니가 드신) 그 반찬이 어떤 반찬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저는 '어떤 반찬이었는지'를 '어떤 반찬을 드셨는지'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드셨는지'와 연결된 주어가 '반찬이'가 아니라 '할머니가'로 바뀝니다.
큰 차이는 없지만, 'A(명사/사물 주어)가 B(명사)이다' 구조에서 'C(명사/사람 주어)가 D하다(동사)'로 바뀌면, (1) 단조롭지 않고 (2) 동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평범한 사회복지사들이 글로써 소박하게 자기 삶을 정리한 이야기>
<50주 동안 이어질 강점관점실천 공부 자료 나눔 프로젝트>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강의/자문/상담 문의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010-8773-3989 / jaewonrhi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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