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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3. 12. 22.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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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김정현(안동성좌원 요양복지과 팀장, 2023)
    첨삭 지도: 이재원(강점관점실천연구소, 2023)


    내 친구 Y와는 해마다 생일 때만 연락을 주고 받는다. 음성통화가 아닌 메시지로만. “Y, 생일이네? 축하해” 혹은 “생일이구나 다음 생일까지 건강하렴.” 내가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면, Y는 “그래 고마워” 라거나 “너도 건강하게 잘 지내” 라고 답장을 보내온다. 가끔 이모티콘이 뒤따라 오기도 하지만 더 이상 메시지를 주고 받지는 않는다. 다음 해 생일까지 잊고 지낸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출근하여 컴퓨터를 켜고 평소처럼 메신저 어플을 시작했다. 오늘 생일자에 이 친구 이름이 뜬다.

     

    나: Y, 오랜만이다. 생일 축하해. 행복한 하루되길 바란다. 

     

    잠시 후 친구는 고맙다고 간단하게 답을 보내왔다. 헌데, 오전 업무를 정리하고 휴대폰을 켜니 이 친구가 또 다른 메시지를 더 보냈다.

     

    친구: 건강 지킬 나이다. 너도 몸 챙겨가며 일 해라.

    친구: 지금 어디 살아? 나는 안양에 살고 직장은 수원이야.

    친구: 출근해서 커피 한 잔 마신다. 오늘 하루도 수고해라.

     

    며칠 후 친구가 메시지를 또 보냈다.

     

    친구: 일본 출장 다녀오느라 바빴다. 너도 직장 다니랴 가정 돌보랴 바쁘겠구나?

     

    친구는 딸 셋이 담긴 사진도 한 장 붙여 보냈다. 사춘기 아이들이 까만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환하게 웃는다.

     

    나: 공주님들이 모두 아빠 닮았네. 너 중학교 때 모습 생각난다.

     

    답글을 쓰며 나도 예의상 가족 사진을 한 장 보냈다.

     

    그후 우리는 늘 만나던 친구마냥 가족 이야기, 직장 이야기 등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에 대해서 속닥속닥 메시지를 주고 받는다. 50대 외간 남자와 주고 받는 대화가 이렇게 다정해도 되나 싶게.

     

    내 머릿 속 Y는 열여섯 살 까까머리 소년이다. 거뭇한 콧수염이 막 돋기 시작한 Y는 명랑하고 엉뚱하지만 착하고 예의발랐다. 바른 소년이었다. 가끔 엄마가 전화를 받으면 인사를 하도 잘 해서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 우리는 학교 연합 동아리 일로 매달 한두 번 얼굴을 봤지만 따로 매주 두세 통씩 편지를 주고 받았다. 게다가 모든 편지는 둘만 아는 암호를 이용했다. 둘만 주고받는 편지에 둘만 아는 암호라니(Y가 제안했다의 아이디어였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유치발랄하지만 암호표를 다 외울때까지 더듬거려가며 편지를 읽고 쓰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특별한 비밀을 공유하는 이들끼리만 아는, 묘한 두근거림이 좋았다.

     

    하지만 Y가 고2때 서울로 전학가면서 연락이 끊겼다.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그를 잊어버리고 살았다. 이십여 년이 지난 후 동창을 통해 다시 그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호리호리하던 남학생은 뱃살이 두둑한 중소기업 임원이자 세 딸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엊그제에는 회사 로고가 찍힌 새해 다이어리를 보내줬다. 받았다는 인증 사진을 찍어 보내며 인사글을 남겼다.

     

    나: 수첩 좋다. 막내딸 기숙사 데려다 주러 수원 가면 연락할게.

    친구: 그래. 연락해. 얼굴 한번 보자.

     

    내가 만나자는 말에 그가 망설이거나 거절했다면 미련이 남았나 오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시원스레 대답하니 오히려 상쾌하다. 예전 같은 설렘은 느껴지지 않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니 마음이 훈훈해진다. 수원에 가도 그에게 연락하진 않을 듯하다. 그저 수원에 사는 내 친구, 그와 나눈 오래된 우정을 마음에 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좋으니까. 그도 같은 마음이리라.

     

    <안내> 

    _ 본 글은 직접 글을 쓰신 김정현 팀장님께 공식적으로 사용 허락을 받았습니다. (교육 및 출판 목적)

    _ 김정현 팀장님께서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글쓰기 클래스 기본반 '글로위로'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이재원 선생 피드백>

     

    1. 한 마디로, 걸작입니다. 이 글은 김정현 선생님께서만 쓰실 수 있습니다. 김정현 선생님 개성이, 이제 막 잡아 올려서 펄펄 뛰는 활어같이 생생합니다. 알 속에서 웅크렸던 김정현 월드가 껍질을 깨고 나와서 마구 뛰어 다닌다고 말하겠습니다. 

     

    2. 이 글은 깊습니다. 김정현 선생님께서 두 부 사이에 오고간 깊은 사연을 절반쯤은 행간에 숨겨 놓으셨으니까요. 사실, '첫사랑(선생님께서 언급하지 않으셨지만 이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이나 '우정', 혹은 '미련' 같은 단어는 너무 의미 범위가 너무 고정되어서 두 분 관계를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 딱히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수백만 가지 관계가 존재하니까요. 저도 이 글을 읽으면서, 제가 스쳐 지나온, 역시 딱히 뭐라고 규정하지 못해서 이름이 없는, 수백만 가지 관계를 떠올렸답니다. 후후. 

     

    3. 감히 말씀드리건대, 제발 친구 분을 만나지 마세요. 현실적으로 무슨 일이 생기리라고는 전혀 예상/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냥, 두 분 사이에 놓인 기가 막히게 절묘한 거리감을 응원(?)하기 때문입니다. 들판에 아름답게 피어난 이름 모를 꽃을, 차마 꺾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네,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4. 어법에 관해서 딱 두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a1) Y는 명랑하고 엉뚱하지만 예의바른 소년이었다.

    (a2) Y는 명랑하고 엉뚱하지만 착하고 예의발랐다. 

     

    원문에 서술격 조사 '-이다'를 쓰쎴습니다. 늘 말씀드렸지만, '-이다'로 끝나면, 그 앞에 나오는 체언(여기에선 '소년')이 강조됩니다. '-이다' 앞에 나오는 어구가 짧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길어질 때는, 해당 체언 앞에 나오는 관형사를 술어로 삼으면 문장이 훨씬 더 좋아집니다. 그래서 '소년'을 지우고, 관형사 '예의바른'을 형용사 '예의바르다'로 바꿔서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관형사 두 개가 겹쳐서 나오니,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서, 관형사 '착하고'를 추가했습니다. 

     

    (b1) 둘만 주고받는 편지에 둘만 아는 암호라니(Y의 아이디어였다)!

    (b2) 둘만 주고받는 편지에 둘만 아는 암호라니(Y가 제안했다)!

     

    왜, 어떻게 바꾸었는지 단박에 아시겠지요? 이렇게, '의'는 무섭습니다. 어디에서나 나타납니다. 


    <평범한 사회복지사들이 글로써 소박하게 자기 삶을 정리한 이야기>

     

    성숙을 담는 글쓰기(PDF 버전)

    '자기-돌봄(self-care)'를 주제 삼아 인천광역시사회복지사협회가 기획하고, 지난 수 년간 사회복지사에게 글쓰기를 가르쳐 온 강점관점실천연구소에서 진행했습니다. 인천시 각 지역에서 성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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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자문/상담 문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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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0-8773-3989 / jaewonrhi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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