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시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3. 12. 27. 06:52728x90반응형
홍시
글쓴이: 김정현 (안동성좌원 요양복지과 팀장, 2023)
첨삭지도: 이재원 (강점관점실천연구소, 2023)
늦가을이 되었다. 생활관 앞에 웃자란 감나무가 ‘나 여기있소’ 속삭이는 계절. 가지치기도 거름주기도 제대로 하지 않아 볼품없이 자란 감나무. 해마다 제멋대로 삐져나온 새 줄기가 요양실 창문을 두드리며 그늘을 만들고 무성한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린다. 감나무가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잉잉거리며 날아드는 벌 때문에 언제쯤 감이 익기 시작하는지는 누구나 안다.
추석 전에 깎아놓은 잔디잎 끝이 가을 햇살에 누렇게 바래갈 때쯤이면 사람보다 먼저 단내를 맡고 벌이 찾아온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한 벌은 잘 익은 대봉감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가장 단 맛이 나는 부분만 콕콕 찍어 먹고 다른 감으로 옮겨 간다. 상처가 생긴 감은 대부분 썩으면서 꼭지째로 빠져 땅에 떨어진다. 떨어지지 않은 감은 나무에 매달린 채 상처 부위가 꼬들꼬들 오므라들면서 계속 익어간다.
추석맞이 제초 작업을 끝내고 한숨 돌린 직원들이 트럭에 사다리, 장대, 소쿠리를 싣고 감나무 밑으로 모여든다. 감이 조금 단단할 때 따서 좀 더 익히지 않으면 절반은 벌들이 먹고 절반은 가을 태풍에 모두 떨어져 버린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생활관 어르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감을 딴다. 추석이 지나면 어르신들은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나가서 감나무를 살피신다.
“쪼매만 있으마 따야겠다.”
“은제 따노? 주워 먹어 보니 달드라.”
성질 급한 어르신은 떨어진 풋감을 주워다 박스에 담아놓고 익히시기도 한다.
“할머니 감나무 밑에 가지 마세요. 벌에 쏘이면 어쩌시려고요. 썩은 감을 밟으면 미끄러져서
넘어질 수도 있어요.”
암만, 이렇게 말한다고 직원 말을 들으실 리는 없지. 우리가 감시(?)하면 더욱 더 은밀하고 부지런히 감을 주워 모으신다.
올해도 감나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올라 보란 듯이 가지 끝마다 탐스럽게 감을 맺었다. 트럭 위에 사다리를 놓고 키 180cm가 넘는 김 팀장이 올라가도 장대 끝이 안 닿는다. 김 팀장은 용을 쓰다가 포기하고 사다리에서 내려온다. 그리고는
“저건 까치밥!”
이라고 말하며 땀을 닦는다. 이렇게 올려다 보니 까치밥이 꽤 많다. 직원 대여섯명이 이틀에 걸쳐 생활관 앞 두 나무, 생활관 건너편 두 나무에 매달려 애를 쓴 덕분에 열 자루 가량 감을 땄다. 생활관 2층에서 시원하고 그늘진 방을 골라 길게 긴 상을 펼친다. 대봉감을 자루에서 꺼내 오와 열을 맞춰 늘어 놓고 나면 감 수확 작업은 일단 끝난다.
딱딱한 대봉감이 떫은 맛을 버리고 말랑하고 달달한 홍시가 되려면 한 달쯤 걸린다. 그동안 우리는 홍시방에 무시로 들러 들여다 보고 요리조리 굴리고 상한 것을 골라내가며 정성을 들인다. 홍시를 출하하는(?)날. 과장님이 얼굴에 미소를 그리며 앞장서면 주간 근무자들이 넓은 쟁반에 큼직한 홍시를 담아들고 뒤를 따른다. 우리는 먼저 요양실 1호로 들어간다. 과장님이 첫 번째 침대에 계신 어르신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르신, 감 따서 손질한 거 홍시 만들었어요. 맛좀 보세요.”
라고 말하며 눈짓한다. 그러면 뒤따라온 직원 중 한 명이 홍시를 고이 받쳐들고 어르신 손바닥 위에 놓아 드린다.
“하이고 잘 익었네. 맛 좋다. 직원들이 고상했다.”
어르신들은 마치 처음 홍시를 받아든 아이처럼 마냥 좋아하시고, 과장님은 뿌듯하게 어르신들을 바라보신다. 나는 그 뒤에서 홍시 쟁반을 받쳐들었고, 직원들은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빙 둘러섰다.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 모습이 늦은 가을 추수감사제를 흥겨우면서도 엄숙하게 진행하는 제관 같다. 마치 처음 홍시를 받아든 사람처럼 감동하시는 어르신들과 뿌듯한 표정으로 어르신들을 바라보는 과장님, 그 뒤에 홍시 쟁반을 받쳐든 나, 두 손을 공손히 모르고 둘러선 직원들 모두 엄숙한 제천 행사에 참여한 제관들 같다.
각 방을 돌면서 일일이 홍시를 나눠 드린 후 직원들도 맛을 본다. 바싹 마른 감꼭지를 뜯어내고 양쪽으로 벌리면 반으로 갈라지면서 붉은 속살이 드러난다. 쫀득한 식감과 감칠맛에 집중하려고 눈을 감는다. 입을 우물거리고 있자니 아주 어릴 적 할머니가 떠먹여 주시던 홍시가 생각난다. 설날 앞두고 엄마가 한과를 만들기 위해 밤새 고았던 엿물처럼 달짝지근하다.
이 순간만큼은 다른 어떤 맛있는 디저트를 준다 해도 홍시와 바꾸고 싶지 않다. 충만하고 다정한 맛. 어르신들도 이 맛이 그리워서 불편한 다리를 끌고 홍시를 주우러 가시리라. 당신이 어릴 때 가족 중 누군가가, 젊을 때 친구나 영감님이 먼지 쓱쓱 닦고 건네주던 맛, 마음까지 말랑해지던 단맛이 그리워 가을이 되면 감나무를 자꾸 쳐다보시나 보다.
홍시 하나에 마음이 착해진다. 입가에 묻은 홍시를 핥는 직원들이 어린 아이처럼 순해보인다. 나도 조금 더 착해지고 싶어서 큼직한 홍시를 하나 더 집어들었다.
<이재원 선생 피드백>
1. 짝짝짝! 이번에도 걸작을 쓰셨습니다그려. 그동안 학생을 지도하면서 제가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이야기(서사)를 기가 막히게 전개하면, 그 뒤에 설명을 불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뛰어나면, 부가적인 설명이 녹아서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제가 깨달은 비밀을 또 다시 확인했습니다. (네, 극찬입니다.)
2. 처음에 수업을 시작할 때, 김정현 선생님 문장에는 먹물이 잔뜩 보였습니다. 김정현 선생님 감성은 부드럽고, 순수하며, 고매한데, 먹물 흔적이 이리저리 엉망진창 망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지도하면서도 무시로 걱정했습니다. 전부 다 지적하고 고치라고 요구하면 힘들어 하시거나 상처받으실 수도 있는데... 하지만 김정현 선생님께서는 시종일관 겸손하게 배우려고 애쓰셨죠. 단단하게 앉은 딱지를 떼어내서 피를 내고 새살이 돋을 때까지 기어이 참아내셨죠. 그래서 이렇게 놀랍도록 바꿔내셨습니다. (습관은 운명이라서 바꾸기 어려운데, 바꾸셨잖아요.) 선생으로서 경의를 표합니다. (네, 극찬입니다.)
3. 이 글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반드시 '문학성'에 대해서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정현 선생님께서는 홍시를 세 가지 차원으로 그려내셨어요. 첫째, 현재 성좌원 분위기. 이 글을 읽노라면, 성좌원에서 사시는 어르신과 직원들이 어떻게 관계맺는지 상상하게 됩니다. 잘 익은 홍시처럼, 진하고 흐뭇한 관계죠. 둘째,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품을 수 있는 어릴 적 추억. 충만하고 다정한 맛. 홍시에 담긴 정서를, 이 표현보다 더 적절하고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셋째, 제관이 되어 참여한 늦가을 추수감사제(제천 행사). 참말로 절묘하면서도 참신하게 비유하셨어요. 세 가지 색 셀로판지를 겹쳐놓은 듯, 이 세 차원을 부드럽게 겹쳐놓으셔서, 안그래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글이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게 느껴집니다. 글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요소는, 글쓴이가 어떻게 맞물리도록 쓰느냐에 따라서 군더더기로 전락할 수도 있고, 이렇게 천상계로 승천할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지도하면서, 군더더기에 대한 제 생각을 넓힐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4. 어법에 관해서는 딱 두 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실제로는 한 가지) .
(a1) 생활관 2층에서 시원하고 그늘진 방을 골라 긴 상을 펼친다.
(a2) 생활관 2층에서 시원하고 그늘진 방을 골라 길게 상을 펼친다.
'긴'은 관형사입니다. 관형사는 체언(명사) '상'을 수식하죠. 그러면 주인공은 '상'이 됩니다. 반면에, '길게'는 부사입니다. 부사는 용언(동사) '펼친다'를 수식하죠. 그러면 주인공은 '펼친다'가 됩니다. 누누히 말씀드렸듯, 한국어는 용언이 주인공입니다. 용언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구사할수록 한국어답습니다. 문장이 살아나고 움직입니다. 술술술 읽을 수 있고, 재미있습니다.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곰곰 느껴보시고 생각해 보세요.
(b1) 마치 처음 홍시를 받아든 사람처럼 감동하시는 어르신들과 뿌듯한 표정으로 어르신들을 바라보는 과장님, 그 뒤에 홍시 쟁반을 받쳐든 나, 두 손을 공손히 모르고 둘러선 직원들 모두 엄숙한 제천 행사에 참여한 제관들 같다.
(b2) 어르신들은 마치 처음 홍시를 받아든 아이처럼 마냥 좋아하시고, 과장님은 뿌듯하게 어르신들을 바라보신다. 나는 그 뒤에서 홍시 쟁반을 받쳐들었고, 직원들은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빙 둘러섰다.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 모습이 늦은 가을 추수감사제를 흥겨우면서도 엄숙하게 진행하는 제관 같다.
다소 길게 펼치셨지만, b1 문장은 결국 '어르신, 과장님, 나, 직원들은 제관들 같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어에 해당하는 각 명사 앞에는 길게 수식어구가 늘어섰습니다. 일단, 호흡이 너무 깁니다. 그래서 잘랐습니다. 그리고 원문에 사용하신 주어를, 각 절에서 주어로 자리를 높였습니다. 원문 뜻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좀 더 생동감 있게 바꾸었습니다.
<평범한 사회복지사들이 글로써 소박하게 자기 삶을 정리한 이야기>
<50주 동안 이어질 강점관점실천 공부 자료 나눔 프로젝트>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강의/자문/상담 문의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010-8773-3989 / jaewonrhie@gmail.com)
'지식 공유하기(기타) > 글쓰기 공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사카에 핀 웃음꽃 (0) 2024.01.05 사회복지사 민경재, 뇌섹남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0) 2023.12.29 친구 (0) 2023.12.22 나는야 이승윤빠! (0) 2023.12.21 빨간 양말같은 '글로위로' 출판기념회 (0) 202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