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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학생이 걸작을 썼다
    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4. 3. 28.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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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글쓰기 선생이다. 그래서 주로 학생을 가르치지만, 가끔씩 학생에게 크게 배운다. 최근에도 어떤 학생에게 제대로 배웠다. 이기국 사회복지사. 진도에서 아담한 노인복지관을 이끄시는 젊은 기관장이시다. 예전에 나에게 해결중심상담도 배우셨는데, 그때도 단기간에 놀랍게 성장하셔서 무척 놀랐다. 그런데 이번에 참여하신 글쓰기반에서도 놀라운 학습 능력을 보여주셨다. 음, 서론이 너무 길었다. 바로 사례로 들어가서 이기국 관장님께서 쓰신 글을 분석하겠다. 왜, 어째서 잘 쓰셨는지 따져 보겠다.


    제목: 아빠 나 잠수했어요

     

    글쓴이: 이기국(서경노인복지관 관장, 2024)

    첨삭지도: 이재원(강점관점실천연구소, 2024)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초등학교 3학년 딸은 물놀이를 좋아한다. 하지만 깊은 물은 무서워한다. 그러다 보니 다른 아이들처럼 잠수하고 다이빙하면서까지 즐기지는 않는다. 아들은 5살 때 수영장에서 놀다가 튜브가 뒤집혀서 혼줄이 난 후로 아직도 겁을 내고, 딸은 원래 겁이 많다. 그나마 딸은 몸을 잡아주면 물장구라도 치지만, 아들은 가슴높이 수영장에도 부담을 느낀다. 물속에 들어가는 행위 자체가 무섭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날씨가 조금만 따뜻해지면 수영장에 가자고 떼를 쓴다.

     

    (단락 분석) 

    (a) 글쓴이는 첫 문장에서 바로 주요 등장 인물을 소개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야기를 쓸 때, 배경을 너무 길게 설명한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회복지사로서 겪은 일을 적는데,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떻게 자랐으며, 어떻게 사회복지사가 되었는지를 쓸 필요는 없다. 그렇게 긴 대하서사시(?)는 쓰기 힘들다. 왜 힘든 일을 자처하나.

    (b) 이 단락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첫 문장으로 돌아간다. 글쓴이는 이 단락을 쓸 때 결론부터 제시했고, 이후에는 이 결론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썼다. 뒤로 갈수록 세부적인 내용이 나오지만, 첫 문장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덕분에 이 단락은 뚜렷하면서도 다채로워졌다. 경계선을 잘 치고 그 안에서 신나게 놀기. 글 잘 쓰는 비법이다. 

     

    예전에 “아빠가 주식으로 돈 많이 벌면, 할머니 집 앞에 수영장 만들어 줄게.”라고 호언장담했다. 실제로 돈을 벌진 못했지만, 친구에게 간이 수영장을 빌려서 할머니 댁 마당에 수영장을 설치했다. 물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수영장을 조립하고, 천막도 설치했다.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을 한 바가지 흘렸지만, 애들이 좋아하리라 생각하니 힘든 줄 몰랐다.

     

    (단락 분석) 

    (c) 첫 단락에서 인물을 간결하고 선명하게 소개하니, 두 번째 단락에서는 한결 쉽게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다. 첫 단락에서 쓴 인물 특성 때문에 사건이 벌어진다: '아이들이 (물을 두려워하지만) 물놀이를 많이 좋아하니, 아빠가 수영장을 만들었다.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서 수영장을 완성했다. 힘들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d) 아빠가 수영장을 만드는 과정을 정말로 길게 쓸 수도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간이 수영장을 조립하는 과정을 한 두 문장으로 요약했다. 왜? 전형적인 삼천포니까. 핵심 주제와 별로 상관이 없으니까. 아이들이 수영하는 행동이 중요하니까. 아이들이 무섭지만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글쓴이가 떠올린 생각이 주제니까. 

     

    마침 날씨가 워낙 더워 온 가족이 정신없이 놀았다. 잠시 한쪽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깜짝 놀랐다. 아이들이 잠수를 시작했다! 머리가 물 속에 조금만 들어가도 기겁하던 아이들이 물안경을 쓰고 얼굴을 살짝 물에 담갔다. 이후 무척 자연스럽게, 아들과 딸은 잠수 대결을 하고, 물건을 던져놓고 물속에서 찾는 놀이도 즐겼다.

     

    (단락 분석)

    (e) 이제 두 단락에 걸쳐서 서서히 빌드업한 사건이 유의미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분명히 아이들은 물을 너무나도 무서워하는데, 물 속에서 놀면서 즐겁고 편안해진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물속에 잠수하기 시작했다. 용기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그래서 피하고 싶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시도하는 행동, 아닌가? 

    (f)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글쓴이는 아이들이 용기를 내는 순간을 포착했다. 뙤약볕 아래에서 수영장을 만드느라 땀을 한 바가지나 흘렸는데, 앉아 쉬면서 멍~때릴 수도 있었는데, 아이들이 용기낸 모습을 툭, 하고 붙잡았다. 작은 에피소드 안에서 핵심을 잡아내는 능력. 이 능력이 깔끔한 글로 이어진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수영은 꼭 배워야 한다. 적어도 물에 뜰 줄 알아야 긴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라고 재촉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괜히 걱정했다. 정말 대견하고 뿌듯했다. 여전히 아이들은 물이 무섭다고 하지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물 공포증을 완전히 이겨내는 날까지 조용히 뒤에 서서 아이들을 응원해야겠다.

     

    (단락 분석)

    (g) 첫 번째 단락에선 인물과 배경(시간/장소)을 소개했고, 두 번째 단락과 세 번째 단락에선 유의미한 사건이 벌어졌다. 글쓴이는 마지막 네 번째 단락에서 본인이 사건에 부여한 의미를 명시적으로 밝힌다: '아이들은 어려움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다. 아빠로서 나는 아이들이 스스로 이겨내도록 뒤에서 지원해야겠다.' 

    (h) 애초에 글쓴이가 작은 이야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결론도 쉽게 쓸 수 있었다. 글쓴이는 아이들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고, 어떻게 아이를 낳고 길렀는지 쓰지 않았다. 그냥 지금, 여기에서 아이들에게 일어난 일을 가볍게 소개하는 마음으로 썼다. 


    (사족) 

    (i) 글쓴이가 구사한 플롯을 분석한다면, '인물-사건-의미'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글쓴이는 이야기 초반에 인물을 소개하고, 이 인물이 보이는 유의미한 행동을 관찰한 후, 인물이 한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적절하게 정리했다. 전체적으로 내용, 구조, 길이가 딱 맞아 떨어져서 깔끔하면서도 풍성한 글이 탄생했다.  

    (j) 사람들은 글을 어떻게 쓰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한다. 이 글을 잘 읽어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글쓴이가 의미를 포착한 순간을 곱씹어 보라. '어? 물을 무서워하는 애들이 잠수를 하네?' 이 순간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이 순간을 결론으로 만들고, 이 결론을 소개하기 위해서 앞부분에 인물을 소개했다. 글은 첫 문장이 아니라 생각에서 시작한다. 

    (k) 이 글은 담백하다. 이 담백한 느낌은 어디에서 올까? 글쓴이는 수식어구를 절제면서 썼다. 다시 말하자면, 호들갑 떨며 쓰지 않았다. 본인이 경험한 소박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고 애썼다. 꾸미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대단히 역설적으로, 이 담백한 태도가 글 전체를 근사하게 꾸며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사여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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