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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 일기(D+1282)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5. 8. 1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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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콩이 이야기

     

    딸: "아빠, 땅콩이 이야기 해 줘."

    나: "옛날 옛날에, 봄이가 살았어. 봄이 옆집엔 땅콩이가 살았는데, 어느날 엘리베이터에서 봄이가 땅콩이를 만났어. 봄이는 땅콩이와 인사를 나누고, 땅콩이와 친구가 되었어. 둘은 보람놀이터에 가서 재미있게 놀았어. 그네도 타고, 미끄럼틀도 타고..." 

     

    평일 밤, 9시 30분. 나는 이야기꾼이 된다. 아니,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아빠가 '땅콩이 이야기'를 들려줘야만, 딸(생후 42개월)이 자니까. 엄마가 이야기하면 안 된다. 꼭 아빠가 나서야 한다. 안 그러면 슬쩍 짜증을 낸다. 이미 습관이 그렇게 단단히 굳어졌다. 

     

    처음에는 딸이 좋아하는 강아지 인형 이야기를 간단하게 만들어서 들려 줬다("우리집엔 강아지 인형 네 마리가 있어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는 모두 예뻐요..."). 그런데 봄이가 가을이를 주된 애정 대상(애착 인형?)으로 삼은 후에는 '가을이 이야기'로 변했다. 

     

    당시에 우리 가족은 빌라 건물에 살았는데, 같은 층 옆집에 어떤 중년 여성이 귀여운 갈색 강아지 '땅콩이'와 함께 살았다. 우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로 마주치면 그냥 가볍게 목례만 나누었는데, 봄이가 '땅콩이'에게 관심을 주면서 관계가 아주 살짝 더 깊어졌다. 봄이가 강아지를 사랑하는 모습이, 많이 좋아 보였나 보다. 아주머니는 종종 지갑을 열어서 배춧잎을 주셨다. 

     

    땅콩이를 만난 후로, 봄이는 잠자리에서 땅콩이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약간 의아했다. 땅콩이는 정말 가끔씩만 스치듯 만나고, 땅콩이네 엄마와도 여전히 인사 정도만 나눴으니까. 분명히, 봄이는 땅콩이와 특별히 기억할 만한 추억을 쌓지 않았다. 그런데도 봄이는 굳이 '땅콩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쩝... 달리 방법이 있나, 딸이 원한다는데. 나는 봄이가 땅콩이를 만나서, 집 근처 '보람 놀이터'에 놀러가서, 어린이집 친구들과 노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들려주었다. 첫 버전은 매우 짧고 간단했다. 그런데 매일 밤마다 들려줘야 하니 여러 가지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게 되었고, 이제는 땅콩이 이야기는 꽤 길어졌다. 

     

    나는 때로는 낮에 읽은 동화책 이야기를 넣었고("옛날에, 땅콩이 옆집에 봄데렐라가 살았어.") 때로는 봄이가 낮에 어린이집에서 참여한 활동을 넣었다("오늘 봄이는 땅콩이와 함께 음악회에 다녀왔어.") 봄이는 새로운 요소를 만나면 무척 재미있어했다. "깔깔깔. 아빠, 나 봄데렐라 아니야. 봄이야!" "아빠, 음악회에 첼로가 있었어. 첼로는 바이올린이랑 비슷해."

     

    곰곰 따져 보니, 땅콩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봄이는, 상당히 외향적이다. 이야기 속에선 낯선 사람이나 동물에게 쉽게 다가가서 먼저 인사한다. "안녕? 나는 봄이야. 너는 누구니?"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새로 사귄 친구에게 먼저 놀이를 제안하면서, 자꾸 집에 가서 함께 놀자고 적극적으로 꼬신다. "땅콩아, 우리 집에 놀러 갈래? 우리 집에 가면 엄마랑 아빠가 계셔." 

     

    사실, 봄이는 상당히 내향적이다. 아빠를 무척 닮았다. 태생적으로 겁이 많고(불안), 무척 조심스럽다. 특히, 어두운 곳, 비둘기, 큰 소리를 무서워한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곧바로 엄마, 아빠 뒤에 숨는다. 그래서 봄이에게 땅콩이 이야기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그림을 마음껏 펼치거나, 바람직한 언행을 연습해 보는 안전한 비현실, 즉 '판타지'에 가깝다. 

     

    '땅콩이 이야기' 이전 버전을 마음 속으로 되짚어서 떠올려 보면, 봄이는 계속 이야기를 따라 걸으며 성장했다. 그러니까, 먼저 이야기 줄기가 생겨나고, 조금씩 확장되면서, 서서히 이야기 내용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예컨대, 이야기 속에서 아파트 관리인 할아버지에게 인사하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실제로 할아버지에게 인사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사람은 이야기를 만들면서, 혼란스러운 감정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마음에 '질서'를 잡는다. 왜? 이야기는 말이 되어야 한다. 원인과 결과로 묶든, 개념과 사례로 엮든, 앞과 뒤가 서로 잘 붙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야기를 일관되게 만드는 과정에서 '아, 내가 그래서 화가 났구나', '이 일은 나에게 이런 뜻이구나' 라고 감정을 정리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면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면 마음은 힘이 세지고 건강해진다. 그리고 건강한 마음은 서서히 말과 행동으로 '외화'된다. 봄이가 전에 안 보이던 긍정적인 말과 밝은 행동을 할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우리 가족이 밤마다 만들어서 나누는 땅콩이 이야기가 효과가 있었겠지?' 생각하며 남몰래 웃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오늘 밤에도 새로 만든 땅콩이 이야기가 우리집 침대를 스치운다."

     

    (2025년 8월 14일, 목요일. 이재원 씀)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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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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