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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 일기(D+1300)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5. 9. 8.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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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안 하는 방법


    올해 진도로 여름휴가를 떠났다가, 지인을 만났다. 이기국 사회복지사. 그는 학생으로서 나에게 글쓰기를 배웠으며, 올해 내가 가족 여행지로 진도를 선택하도록 영감(?)을 줬다. 그는 언젠가 글쓰기 수업 시간에 가족과 함께 휴가철 성수기를 피해서 진도에서 가까운 ‘관매도’로 여행을 다녀 온 이야기를 글로 썼다. 다도해 속 외딴 섬, 아무도 없는 아름다운 백사장에서 가족과 신나게 놀았다는 내용이 퍽이나 인상깊었다. 

     

    나는 글을 읽으며 우리 가족도 그림 같은 관매도 해변에서 노는 장면을 떠올렸는데, 올해 문득 관매도가 생각나 아내와 딸을 매달고(?) 서울에서 진도까지 5시간 반 동안 운전했다. 그리고 자동차를 배에 싣고 관매도까지 들어가서, 넓은 백사장을 통으로 전세 내고 우리끼리 재미있게 놀았다. 도대체 관매도 해변이 어떻길래? 밀물 때 바닷물이 발목에 살짝 걸칠 정도로만 낮게 들어오는데, 우리가 마치 거대한 거울 위에서 미끄러지며 춤추는 듯했다. 

     

    시간이 차서 상경하려고 관매도에서 진도로 나온 토요일 오후, 우리 가족은 진도읍 어느 까페에서 이기국 사회복지사를 만났다. 날씨가 무척 맑았는데 괜히 손님 티를 내며 부담주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식사 시간을 피해서 만났다. 그런데 나는 딸이 조금 걱정스러웠다. 봄이는 낯을 많이 가려서,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숨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다른 곳을 바라본다. 특히, 키가 큰 남자 어른 앞에 서면 너무 무서워서 아빠 뒤로 숨어버린다. 

     

    이기국 선생님은 사람을 만날 때 마치 하회탈처럼 부드럽고 친근하게 표정을 짓지만, 키가 무척 크다. 봄이가 부담스러워하는 완벽한 조건에 해당한달까: 키가 크고 처음 만나는 남자 어른. 그래서 나는 당연히 봄이가 이리저리 도망다니니라 예상했다. 하지만 의외로 봄이는 무척 편안하게 반응했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이기국 선생님과 슬쩍 눈빛을 교환하더니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나중에 헤어질 무렵에는 심지어 웃으면서 하이 파이브까지 나눴다.

     

    나는 궁금했다. 어떻게 봄이 마음을 열었을까? 그래서 물어 봤다. 

     

    “그런데요, 많이 신기하네요. 봄이는 처음 만나는 남자 어른에게 이렇게 빨리, 이렇게 편하게 마음을 열지 않거든요.“ 

     

    그가 수줍게 웃으면서 답했다. 

     

    ”봄이가 낯을 가린다고 말씀하셔서, 그냥 두고 봤어요. 이런 경우엔 친해지려고 뭘 안 해야 나중에 더 쉽더라고요.“

     

    흠... ‘뭘 안 하는 방법’이라? 

     

    그는 수줍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나는 이 답변을 무척 인상깊게 들었다. 보통, 어른이 아이와 친해지고 싶으면,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하든, 장난치든, 돈을 주든, 뭔가 사교적인 행동을 시도한다. 이때, 아이가 반응하지 않으면? 대개는 같은 방법을 조금 더 시도하다가 기회를 날려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담스러우면 안 되니 아예 외면해야 할까? 글쎄… 이러면 관계가 완전히 식을 수도 있겠다. 

     

    나는 이렇게 결론내렸다: 그는 '뭘 안 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뭘 했다'. 분명히, 적극적으로 봄이에게 다가서서 말을 걸거나, 장난을 치지는 않았다. 봄이를 바라보며 웃지도 않았고 먼저 눈길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봄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봄이가 가끔씩 보내는 눈빛을 친절하게 받아 주었다. 마음 편하게 기다리다가, 눈 한 번 깜빡할 사이, 봄이가 허용한 딱 그 틈만큼만 대응했다. 부담스럽지 않게. 

     

    서울로 올라오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아내와 대화를 나누었다. 

     

    나: 여보, 아까 그 양반, 봄이한테 다가가는 모습이 나는 참 인상깊었어. 
    아내: 그러게요. 내가 사람을 딱 알아 보잖아요. 보통 사람 아닌 듯해요. 
    나: 맞아. 뭐랄까... 사람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트는 방법을 이해하는 듯해. 
    아내: 있는 듯 없는 듯,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 있어요. 
    나: 난 관매도가 참 인상적이었는데, 이제 보니  양반이 더욱 인상적이네. 

     

    나만 그리 생각하진 않았구만. 역시, 사람 눈은 비슷하다. 이기국 사회복지사는 부담스럽지 않게 사람에게 다가서는 능력, 혹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다가오도록 만드는 능력을 지녔다. 사실, 내가 상대에게 관심이 있다면, 나에게 스스로 다가오는 사람은 쉽게 친해질 수 있다. 문제는 나는 친해지고 싶은데 그가 딱히 원하지 않거나 살짝 부담스러워하는 상황. 바로 이럴 때, 이기국 사회복지사처럼 '뭘 하지 않는 방법'을 꺼내서 써야겠다. 

     

    시나브로, 서로 부담스럽지 않게. 

     

    2025년 9월 1일, 이재원 기록.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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