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 일기(D+1372)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5. 11. 17. 09:31
    728x90
    반응형

    제목: 충분히
    글쓴이: 이재원

    "싫어! 싫단 말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흐음. 아무래도, 글자로는 표현할 수 없겠다. 아이가 손을 꼭 쥐고, 필사적으로 절규했으니까. 너무 크게 소리를 질러서 내 귀가 저릿저릿했고, 9층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들으셨을까봐 걱정스러웠다. 맥락을 모르고 듣는다면, '저 집에선 아이를 잡나?' 생각하겠다 싶었으니까. 그렇게 딸 앞에서 얼어 붙어 있는데, 아내가 욕실 문을 슬며시 열었다. "오빠, 무슨 일이야?" 이제 막 다섯 살이 되어가는 내 딸 봄이 이야기다.

    우리집 저녁 시간 루틴은 이렇다. 대략 저녁 7시까지 가족이 함께 밥을 먹은 후에, 봄이가 3, 40분 정도 유튜브를 시청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그 사이에 엄마는 씻고 아빠는 책을 읽는다.) 요즘 잘 보는 '까투리 엄마'나 '슈퍼윙스' 동영상을 신나게 몇 편 보고 나면, 봄이는 스스로 노트북 컴퓨터를 덮는다. (기특한 것!) 그 다음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뽀로로/친구들 인형을 들고 뽀로로 집 장난감을 열어서 엄마랑 소꼽장난한다. 아빠가 보기엔 맨날 똑같은 방식으로 노는 듯한데,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둘이서 알콩달콩 깨를 볶으며 논다. 그러다가 9시가 넘으면, 화장실로 들어가서 욕조에 물을 담아 놓고 봄이를 씻긴다.

    보통은 봄이가 욕실 파트너로서 엄마를 선택하는데, 그날은 아내가 잠시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 내가 대타로 봄이를 데리고 욕실에 들어갔다. 아내가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 말해서 진짜로 그냥 봄이 옆에서 얌전히 앉아만 있었다. 봄이는 루틴대로 욕조에 귀엽게 앉아서 허리까지 오는 뜨뜻한 물을 첨벙거리면서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면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느끼기에는 시간이 조금 늘어지는 듯해서, 조용히 목욕 타월을 물에 젹서서 바디 워시를 뭍힌 후에 거품을 조금 내서 봄이 등에 부드럽게 발랐다.

    "봄아, 이젠 씻어야지."

    그 순간, 봄이가... 갑자기 '지랄 + 발광'하기 시작했다. 팔은 마치 벌새처럼 초당 20번씩 휘젖고, 다리는 100m 경주 세계 챔피언처럼 세게 굴렀다. 그리고 이렇게 짧은 순간에 저렇게 많이 울 수 있나 싶게 눈물을 흘렸다. 무엇보다도, 누가 들으면 '아빠가 딸을 학대한다'고 여길 만큼 소리를 크게 질렀다. 아니, 머라이어 캐리도 아니고, 우리 딸이 이리도 강력하게 돌고래 초음파 소리를 낼 수 있다니! 머리가 아플 정도로 크게 소리도 질렀다.

    다행히, 아내가 들어와서 얼어 붙어 있는 나를 욕실 밖으로 밀어냈다. 나는 다소 멍한 상태에서 유령처럼 스르륵 거실로 나와 쇼파에 털석, 몸을 얹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지? 나는 단지 바디 워시 조금 발랐는데, 이렇게나 흥분하고 소리지를 일인가? 평소 봄이도 상황이 제 마음에 안 들면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정말 가끔만 그랬고, 음량도 이번보다 다섯 배는 적었다.

    "대체 왜?"

    자, 정신을 차려 보자. 내가 거품을 등에 바를 때쯤, 봄이가 뭐라고 말했더라? 이제야 생각났다. "아빠, 거품물 되면 싫어. 물이 흐려지잖아." 봄이는 대충 이렇게 말했다. 아니, 거품이 물에 흘러서 약간 탁해지는 상황이 그렇게나 싫어? 물도 여전히 따뜻하고, 놀이도 안 끝났는데? 하지만 봄이는 나와 전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한창 신나게 놀고 있는데, 아빠가 거품을 몸에 발랐으니, 갑자기 놀이를 중단하고 목욕하고 자러 가야 한다고 강요받았다고 느꼈을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 그랬다. 나중에 아내에게 들으니, 목욕할 때 거의 매번 충분히 혼자 놀도록 놔 두어서 그렇단다. '매일 너무나 당연하게' 누려야 할 권리를 아빠가 갑자기 침해한다고 느껴서 그런 듯하단다. 내가 봄이라면? 그래, 녀석 처지에선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었겠다. 어른들 일로 바꿔서 생각해 보자. 내가 평소처럼 아무 생각하지 않고 길을 걷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빨간색 페인트를 뒤집어 썼다면? 당연히 많이 당황스럽고 화가 나겠지.

    "봄아, 그래도 아빠한테 예쁘게 말해야지."

    욕실에서 아내 목소리가 부드럽게 새어나왔다. "소리지르지 마"가 아니라 "예쁘게 말해" 라니... 역시, 우리 마누라는 성숙하고 지혜롭다. 아, 나는 왜 저렇게 자연스럽게 대처하지 못할까. 부끄러웠다. 그리고 얼어 붙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나를 마음 속 구석에 몰아 놓고 스스로 손가락질했다. (역시, 아이를 키우다 보면 종종 내 밑바닥이 훤하게 들여다 보인다.) 하지만 아내가 욕실에서 나와서 속상한 내 마음도 어루만져준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다음에 조심하면 돼요."

    이제, 진짜 이야기를 꺼내 본다. 언제나 이런 상황에서는 내 눈 앞에 낡은 필름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내가 자란 원가족이 등장하는 영화. 정서적으로 너무 서툰 사람들만 모여 살던 집. 무슨 일이 벌어져도 부모님은 얼어 붙으셨다. 성숙하게,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셨다. 그냥 모여 앉아서 걱정하고, 두려워했다. 중학생 때였나, 나는 부모님에게 정서적 양육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이래서 나는 아이를 키우지 못할 거라고 스스로 두려워했나 보다. 아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거라고 무서워했나 보다. 아내가 딸을 임신했을 때, 진심으로 기뻤지만 한편으론 내내 막연하게 두려웠다. 어쨌든 아이가 세상에 나온 후로, 기저귀를 수천 번 갈아대며 아빠 역할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느꼈고, 이젠 딸이 청산유수로 말하는 단계까지 컸으니 육아가 조금은 수월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리셋 버튼'을 누른 듯 느꼈으니.

    하지만 다행히, 나에겐 아내가 있다. 종종 몸만 커다란 아이처럼 행동하는 중년 남자를 거뜬이 안아주는 아내가 있다. 자괴감이 습관처럼 몰려왔지만, 나를 부축해 주는 아내 눈을 들여다 보니 다시 힘이 난다. 부끄러운 감정을 가볍게 인정할 수 있는 마음 공간이 열린다. 서로 고집을 피우며 다툴 땐 꽤 미워도, 이런 순간에는 '나에게 아내가 없었다면?' 이라고 떠올리며 두려워서 몸서리친다. '그래, 별 일 아니야, 다시 아빠로 돌아가서 지혜롭게 행동하면 돼.'

    마음 근육 섬유가 한 줄 더 늘었다고 생각하자. 근육이 찢어졌다가 다시 붙으면서 탄탄해지듯, 나이와 상관없이, 나에게 부족한 근육은 당연히 힘들게 훈련해서 붙여야 한다. 봄이는 앞으로,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언행을 보이겠지. 그래서 나는 또 놀라고 당황하고 속상하겠지. 하지만 매번 근육을 조금씩 붙였다면, 충분히 견딜 수 있어. 그리고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어. 충분히.

     

    2025년 11월 13일, 이재원 기록.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강의/자문/상담 문의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010-8773-3989 / jaewonrhie@gmail.com)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