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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 일기(D+1380)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5. 11. 21.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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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아빠는 왜 남자야?

    글쓴이: 이재원 

     

    "아빠, 아빠는 왜 남자야?"

    "뭐? 아빠가 왜 남자냐고?"

    "응, 아빠는 왜 여자가 아니고 남자야?"

    "끙... 그건 말이지..."

     

    봄이는 이제 막 다섯 살이 되어간다. 봄이는 평소 아빠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데, 얼마 전부터 '밑도 끝도 없는( 쉽게, 바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자주 던진다. '아빠는 왜 남자냐', '엄마는 왜 치마를 입냐', '그림자는 왜 생기냐', '엄마 소중이에는 왜 머리카락이 났냐', '정현이(어린이집 친구/남자) 소중이에는 왜 꼬리가 달렸냐' 등등. 이런 질문을 받으면,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변하면서 머리가 띵~하다. 

     

    어째서 나는 쉽게, 바로 답할 수 없나? 아이가 근본을 물으니까. 어른은 '당연하다고 전제하는, 그래서 너무나 명백하다고 여기는 사실'을 물으니까. 기억을 떠올려 보니, 이런 식으로 대충 뭉개면서 답했다. "아빠는 남자니까 남자야." '얜 뭐 이런 걸 묻지?'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런데 오늘 '아빠는 왜 남자야?' 질문을 또 받으니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일단, 봄이는 두뇌 속 데이터가 거의 '0'인 상태로 태어났다. 먹고, 자고, 싸는, 아기가 살려면 데이터 없이도 바로 실행해야 하는 본능적 행동 프로그램 외에, 세상에 대한 데이터는 없었다. 말하자면, 모든 순간, 모든 인물, 모든 사건이 봄이에게는 새롭고, 놀라웠으리라. 어딘가 부딪힌 후에야 본인에게 머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실제로 아픈 다음에야 '통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겠지. 

     

    이렇게 봄이 편에서 상상해 보니,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매일 일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만나는 거의 모든 당연한 사실이 봄이에게는 너무나도 새롭고, 신기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이제 두뇌가 조금씩 발달하고, 딱 그만큼 세상을 알아가면서, 나는 이미 45년 전에 익힌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언어로 막 이해하고 있다. 언어는 변화무쌍한 세상에 일정하게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니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상식'이 실제로는 '온갖 오류가 섞여든 기괴한 선입견 덩어리'가 아닐까? 물론, 나도 50년이 넘게 데이터를 쌓았으니 내 마음 속 상식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평가할 순 없겠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특정한 방향으로 쌓아온 상식이, 거대한 장벽이 되고, 점점 더 새로운 세계로 못 나아가는 족쇄로 고정되지는 않았을까? 

     

    "오빠, 왜 먼지 나는 빨래를 침대에 올려 뒀어?" 

    "여보, 왜 샤워하면서 꼭 변기에 물을 뿌리니?"

     

    아내와 나는 거의 매일 이런 질문을 주고 받으며 산다. 어떤 땐 잔소리로 듣고 대충 한 귀로 흘리지만, 다른 땐 심장을 제대로 긁혀서 크게 소리 지르며 싸운다. 아주 냉정하게 평가해 보자면, 대체로 아내 말이나 내 말이나 모두 '자기 중심적인 선입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의문사를 '뭔가를 이해할 수 없을 때' 쓴다. 쉽게 말하자면, '너는 틀렸고, 나는 맞았다'고 생각하니까 '왜'라고 말한다. 

     

    아내는 '루틴녀' 라고 불러도 괜찮을 만큼, 일상 생활 습관이 무척 건강하고 착실하다.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시간을 알았다는 칸트 선생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일상을 루틴대로 살아간다. 반면에 나는 늘 뭔가에 몰두하는 인간이라서, 언제든 제대로 집중하면 대체로 루틴을 무시한다. 관심을 두지 않는 일은 종종 깡그리 잊는다. 그래서 종종 아내에게 매우 찐하게 잔소리를 듣는다. 

     

    아내의 '루틴'과 내 '몰두'가 만나면? 상황이 경미하면 핀잔을 주고 받고, 심하면 싸운다. 물론, (거의 항상) 몰두는 루틴을 이길 수 없다. 루틴은 생활 습관이고, 생활 습관은 지켜야 할 미덕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루틴이 진리는... 아니지 않을까? 누군가(부모님) 가르쳐 준대로, 안정적으로 일상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선택한, 임의 사항이지 않을까? 세상에 적응하며 자연스레 고정된 임시 안전핀 아닐까? 

     

    흠, 나도 생각을 바꿔야겠다. 사람은 반복되는 습관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아내는 루틴 덕부에 세상 누구보다도 안정적으로 편안하게 살아간다. 루틴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임의로 선택한 결과물이지만, 따르는 사람에게 너무나 쉽고, 편하고, 자연스럽다. 몰두하는 나를 방해하는 '괴물'이 아니다.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더, 더, 더, 아내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마땅하다. 

     

    다시, 봄이 질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숱한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대충 얼버무리는' 답변은 내놓지 말아야겠다. '아빠가 왜 남자인지' 쉽게 답할 순 없지만, 질문하는 딸에게 최소한 진지하게 답하는 모습은 보여야겠다. 그리고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뉘앙스를 깔면서 답해야겠다. 네가 만드는 상식은 어디까지나 선택하는 임의 사항일 뿐, '언제나 확고부동한 진리'는 아니라고 말해야겠다. 

     

    내가 편한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길을 꾸준히 걸어가되, 세상에는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겠다.

     

    2025년 11월 21일, 이재원 기록.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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