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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D+1440)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6. 1. 19.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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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변기 물이 도대체 뭔데 이렇게까지

    (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 D+1440)

     

    일요일 밤. 주말에 1박 2일 간 경치 좋은 근교로 여행을 다녀와서, 편안히 쉬며 집안을 정리했다. 나는 여행 가방을 정리하면서 거실을 청소했고, 아내는 주방에서 설겆이하고 딸, 봄이(5살)를 돌봤다. 아내가 말했다: "여보, 봄이 빨리 재워야 해요. 그래야 아침에 세수시키고 밥 먹이고 어린이집에 늦지 않게 보낼 수 있어요." 웃으며 내가 답했다: "맞아, 나도 지금 당신과 똑같이 생각했어. 봄이가 늦게 자면 모든 일이 꼬이지." 

     

    봄이는 자기 전에 소변을 보고 치카치카(양치질)하는데, 아내가 봄이에게 양치질부터 시키고 소변을 누이다가 일이 터졌다. 둘이서 웃으며 알콩달콩 대화하는 소리가 화장실에서 들리길래, '참 듣기 좋구나' 생각하며 미소짓고 있었는데, 봄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냐, 내가 한다고오오오!" 하도 크게 외쳐서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봄이가 변기에 앉은 채로 엉엉 울고, 엄마는 옆에서 표정을 세상 난처하게 지으며 섰다. 

     

    나: "왜 그러는데?"

    아내: (두 손을 펴면서) "내가 변기 물 내렸다고. 자기가 내려야 한다고."

    나: "뭐라고? 겨우 그거 때문에 이렇게 아파트가 떠 내려가도록 소리를 질러?"

    아내: (봄이를 달래며) "괜찮아, 다음에 네가 물 내리면 돼."

     

    봄이는 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자기 주장이 강해지면서 "내가 할 거야!"를 입에 달고 산다. 옷도 자기가 입고 벗겠다고 외치고, 신발도 자기가 신고 벗겠다고 외친다. 그래, 뭐 이런 건 좋다. 커서 그러니까. 엄마 아빠도 편해지니까. 그런데 지 혼자서 속마음으로 정해 놓은 루틴을 엄마, 아빠가 깼다면서 울고 불고 난리칠 때, 참 곤란하다. 며칠 전 어린이집 갈 때는, 아빠가 엘리베이터 버튼 눌렀다고 'X랄 발광'해서 정말 난감했다. 

     

    그 순간엔, 아빠가 당황해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며 등을 두들기고 사과해도 안 받아주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똥고집'을 피웠다. 글쎄... 누군가 금방이라도 죽을 상황에 처할 때나 지르는 풀 파워 비명을, 엘리베이터 앞에서 십여 분 동안 질러댔다고 말하면 급박했던(!) 그날 상황이 전달될까? 이렇게 비명을 지르다가 아이가 숨이 막혀 죽을까봐 걱정스러웠을 정도. (겨우겨우 달래서 어린이집에 갔지만 어휴...) 

     

    다시 화장실 앞, 이제 봄이는 바지와 속옷을 무릎까지 내리고 새하얀 엉덩이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발꿈치만 화장실에 두고 주방 쪽으로 엎드려 울었다. 아니, 짜샤. 이미 변기 물을 내려 버렸는데, 네 소변이 든 그때 그 물은 이미 정화조로 흘러 내려가 버렸는데, 그러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데, 엄마 보고 어떡하라고? 음, 가끔씩 이런 문제로 고집을 피웠지만, 이 정도로 오래 대치하면서 고집을 피우진 않았는데... 

     

    "여보, 물 좀 갖다 줄래요?"

     

    아내는 온갖 대안을 제시하면서 봄이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평소에 봄이가 제일 좋아하는 비타민 젤리, 아이스크림을 '출구전략'으로 내밀었지만, 봄이를 달래지는 못했다. 나는 한참 동안 두 사람 옆에 섰다가 서재로 와서 앉았다. 그런데 물 좀 떠오라는 말을 듣고 정수기에서 물을 컵에 떠다 줬더니 아내가 설명해 준다: "봄이가 달래. 물 먹고 오줌 나올 때까지 기다린대. 오늘 꼭 자기가 변기 물을 내려야겠대."

     

    솔직히,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진짜 대단하다. 변기 물이 도대체 뭔데 이렇게까지 꼬장을 피우니?'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상황이 이 정도까지 왔으면, 단순히 아이가 '집착'한다고 보면 안 돼. 변기 물을 스스로 내리는 일이 어쨌든 지금 봄이한테는 너무나 중요한가 봐. 말하자면, '정체성 문제'야. 그래, 자기한테 중요하다는 사실 말고, 우리가 쟤 생각을 어떻게 다 알겠어.' 

     

    서재로 돌아와서 잠깐 앉아 있다가 아내가 다정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서 다시 가 봤더니, 봄이가 막 변기물을 내리고 엄마에게 폭 안겨 있었다. 아내는 봄이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야, 우리 딸, 집념이 대단하네. 넌 뭘 해도 하겠다..." 그리고 아내가 (봄이 몰래) 내게 슬쩍 윙크하며 이렇게 말했다. "굳이 물을 다시 마시고, 오줌이 나올 때까지 변기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까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오네."

     

    우리 부부가 반백 살 먹고 허리 아파가며 어린 아이를 키우면서 매일 발견하고 되새기는 격언: '거의 언제나 그럴 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끼치는 행위는 무조건 막아야겠지만, 눈물 쏙 빼도록 따끔하게 혼내야겠지만, 언제나 아이가 '왜 그렇게까지 말하고 행동했는지'를 궁금해해야 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 살펴 보면, 정말로 거의 언제나 '그럴 만한 좋은 이유'가 있으니까. 

     

    우리는 다 큰 어른이니까, 봄이가 조막만한 손으로 뭐든지 지가 하겠다고 나서면 늘 허술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도 기억을 못할 뿐, 봄이처럼 다섯 살 시절을 거쳐 왔지 않나. 부모님이 보시기에 말도 안 되는 일로 고집을 피우고, 매우 자주 '내가 할 거야!'를 외치며 설쳤겠지. 봄이에게도 다섯 살 시절은 처음이니까, 당연히 '내가 할 거야!'를 외친다. 그렇다면 부모로서 진지하게 봄이 '똥고집'과 'X랄 발광'을 대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아침에도 내가 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줬다. 내가 기다리면서 "자, 봄이, 네가 버튼 눌러" 라고 말하자, 봄이는 하강 버튼을 누르고 깨발랄하게 웃으며 엘리베이터로 들어간다. 그리고 가만히 나를 올려다 보다가 문득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아빠, 어제 수영해서 좋았어요." 짜식, 주말 여행이 즐거웠나 보다. 나는 녀석 궁둥이를 두드리며 이마에 뽀뽀해 줬다. 그리고 혼잣말: "사랑한다, 내 딸. 똥고집 부려도 아빤 행복해." 

     

    2026년 1월 19일, 

    이재원 記.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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