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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D+1470)
    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6. 2. 1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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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방광이 터질 뻔 

    (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 D+1470)

     

    설 명절을 맞이해서 아내, 딸과 함께 경복궁에 다녀왔다, 

     

    라고만 쓰면 아주 일상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 이날 우리 가족에게는 매우 커다란 일이 생겼다. 우리 딸, 봄이가 드. 디. 어. 휴대용 변기에서 벗어났다. 집 밖에서, 그러니까 아무 곳에서나, 공중 화장실을 편하게 이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나를 닮아서 그런지, 봄이는 아기 때부터 겁이 많았다. 특히, 청각이 예민해서, 조금만 소리가 나면 손을 떨면서 깜짝 놀랐다. 겁이야 조금 많을 수도 있지. 그런데 문제는 화장실. 봄이는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내리면 특히 무서워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변기를 싫어했다. 

     

    그나마 기저귀를 뗄 때까지는 괜찮았다. 화장실에 안 데려가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기저귀를 떼고 변기에 앉아야 할 때가 되자, 화장실 자체를 거부했다. 그래서 유아용 변기를 구했다. 어디서 얻고 당근마켓에서 중고로 사고 해서 총 세 개를 구했다. 

     

    흰색 변기는 어른이 앉는 흰색 변기와 비슷해서, 화장실 엄마, 아빠 변기 옆에 두고, 집에서 사용했고, 파란색 변기는 멀리 여행가거나 집 근처로 산책갈 때 썼다. 그리고 분홍색 변기는 애 엄마가 봄이 색깔 취향을 고려해서 특별히 얻어왔는데, 버튼을 누르면 물 내리는 소리까지 나서 배변 연습에 딱 좋았다. 

     

    하지만... 물 내려가는 소리가 문제였다. 분홍색 변기에서 소리가 나자, 봄이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물 내리는 소리가 너무 싫단다. 그래도 아까워서 오랫동안 집안 어딘가에 보관했고, 가끔씩 살살 꼬셨는데, 딸이 너무 거부해서 결국 쓰지 못했다. 

     

    그리고 다가온 마지막 고비. 엄마와 아빠와 봄이는 '5살 생일이 지나면 아빠 변기에 앉아서 쉬하자'고 약속했는데, 꽤 압박감을 느꼈던지 딸이 생일 당일부터 기존에 잘 앉던 유아 변기마저도 앉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괜찮았다. 변기가 싫으면 기저귀라도 차면 되니까. 

     

    그런데 문제가 심각해졌다. 딸이 오줌을 무작정 참기 시작했다. 보통 아이는 4시간에 한 번씩 소변을 보는데, 밤새도록 소변을 안 봤다. 그래서 "마렵냐?"'고 물어보면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답한다. 아닌데 틀림없이 마려울 텐데... 시간이 흐를수록 애 엄마 얼굴이 노랗게 변해갔다. 

     

    결국 우리는 응급의학과에 들렀다. 부랴부랴 초음파 검사를 마치고 의사에게 설명을 들었다. "아이구야, 방광에 소변이 500cc나 들었네요. 이 정도 되면 관을 넣어서 억지로라도 빼 내야 하지만 아이 위에 올라 타야 해서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대단히 희귀한 경우입니다. 일단, 물을 먹이시고 지켜 보시되, 그래도 안 싸면 큰 병원 응급실로 가 보셔야 해요." 

     

    "야~ 이 짜식아, 네 몸이 맥주잔도 아니고 왜 그걸 보관하고 있어!" 상황이 정말 심각했다. 뭔가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애 엄마가 딸 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어 보니, 화장실에는 죽어도 안 들어가겠단다, '기저귀'를 차면 된단다. 

     

    에고... 엄마, 아빠는 네가 아무 변기에나 마음 편하게 앉을 때만 기다렸는데? 기저귀를 차겠다고? 너무 황망했지만, 우리 부부는 아이를 키우면서 배운 최대 교훈을 또 다시 떠올리며 기저귀를 다시 꺼냈다: '엄마, 아빠가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아이를 억지로 움직일 순 없다.'

     

    그래, 기저귀라도 차서 소변을 볼 수만 있다면! 무척 다행스럽게도, 봄이는 기저귀를 차자마자 대단히 시원하게(!) 소변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애 엄마가 또 다른 아이디어를 냈다. 화장실에서 샤워하면서 선 채로 그냥 소변을 보면 된단다. 조금 민망한 방법이지만 잘 통했다. 

     

    역시, 엄마가 중심을 잘 잡아 줬다. 일단 이렇게라도 소변을 보기 시작했으니 다행이고, 조금만 기다려 주면 다시 변기를 사용할 거라고, 답답해하는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과연 아내 말대로 곧 봄이는 다시 유아 변기를 사용하게 되었고, 며칠 전 어른 변기에도 슬쩍 앉았다. 

     

    아싸! 

     

    우리 집에서 경복궁까지는 넉넉 잡아 두 시간이면 훌쩍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하지만 아이가 아무 곳에서나 소변을 볼 수 없다면? 바다 건너 외국처럼 멀게 느껴진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아득한 세계, 라고 말해야 옳다. 그런데 이번엔 휴대용 유아 변기도 안 들고, 아주 마음 편하게, 훌쩍 다녀왔다. 

     

    누군가 변기에 앉아서 볼일 보는 이 단순하고 원초적인 행위를 두고 이렇게 기뻐하고 감사하며 감격스러워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런 일을 매일 겪게 된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웃고 울면서 겪은 온갖 소소한 장면이 모두 모이면, 거대한 기적이 완성된다.

     

    2026년 2월 19일, 

    이재원 記.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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