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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D+1475)임상사회사업가 이재원입니다/Personal Stories 2026. 2. 25. 07:36728x90반응형

제목: 싫어!
(늙은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 D+1475)
<다섯 살 봄이>
아빠! 아니, 그렇잖아요. 제가 도서관에 오자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아까 집에서 재밌게 잘 놀고 있었는데, 아빠가 도서관 유아놀이방으로 가자고 꼬셨잖아요. 며칠 전에 우리가 도서관에 놀러갔던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저는 다리가 여덟개 달린 유쾌한 문어 인형과 두 팔로 나를 꼭 안아 준 새빨간 하트 인형을 떠올렸어요.
우와, 그때 정말 신나게 놀았어요! 유아놀이방에 있던 다른 친구들은 모두 엄마, 아빠에게 붙들려서(?) 책을 들여다 보고 있었는데, 저만 아빠랑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자유롭게 구르면서 놀았으니까요. 그곳은 바닥이 트렘폴린처럼 폭신폭신해서 좋았어요. 아빠 손을 잡고 방방 뛰면서 '둥글게 둥글게' 노래 불러서 정말 신났어요.
아, 그런데 한참 동안 뒹굴다가 손에 그 책이 잡혔어요. 헝겊으로 만들어서 손으로 보드랍게 만질 수 있는 사자 손이 앞으로 삐죽 튀어나온 책. 책장을 넘기면 장면이 바뀌었는데 손은 그대로 있었죠. 그 순간 저는 책을 읽고 싶어졌는데 아빠가 다정하게 안아 주시면서 함께 사자 손을 만져서 재미있었어요. (저는 책이 좋아요!)
오늘 아빠가 도서관에 가자고 말했을 때, 저는 문어 인형, 하트 인형, 트렘폴린처럼 푹신한 바닥, 헝겊손을 만질 수 있는 사자책을 생각했어요. 도서관 유아놀이방에 가면 이 친구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집에서 함께 놀던 야옹이 인형을 데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놀이방에서 함께 놀면 더 재미있을 테니까요.
잉... 저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유아놀이방 문이 닫혔다니요. 밤 8시가 뭔데요? 유리문 안에 불이 켜져 있는데요? 들어가면 왜 안 되나요? 전 놀고 싶다고요! 그래서 말했어요. "싫어!" 라고. 이제 아빠는 무섭게 표정을 짓고 "안돼, 집에 가야 해." 라고 말하겠죠? 그러면 전 "싫어!"라고 외치면서 다시 울어 버릴 거예요.
그 순간, 아빠는 무릎을 꿇고 저를 포근하게 안아주면서 말했어요. "봄아, 지금 여기에서 못 놀아서 많이 서운하지? 네 마음, 알아. 하지만 지금은 놀이방이 쉬어야 한대. 그래야 내일 또 아이들이 와서 놀 수 있대. 많이 아쉽지만 지금은 우리 여기 있는 큰 화면에 눈이 내리니까 엄마랑 함께 눈 굴리면서 놀다 가자. 어때?"
"싫어! 안에서 놀 거야!" 라고 저는 외쳤어요. 저도 알아요. 지금 여기서 놀 순 없겠죠. 하지만 지금 너무 실망스러워서 이렇게 말했어요. 음... 평소 같았으면, 아빠는 제 팔을 꼭 잡고 끌고 나갔고, 저는 더 떼를 쓰며 울었겠죠? 그런데 아빠는 계속 저를 토닥이면서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이렇게 말했어요.
"그러면 우리, 5분 후에 갈까?"
딱, 직감이 왔어요. 어차피 지금은 유아놀이방에서 놀지 못하는데, 여기 '눈이 내리는 그림(벽에는 LED로, 바닥에는 빔 프로젝터 영상으로)' 위에서라도 놀고 가면 좋죠.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은 저도 안다구요. 그냥 가기엔 너무 아쉬워서 '싫다'고 외쳤을 뿐이예요. 그래서 아빠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어요.
"좋아요!"
우리는, 눈이 내리는 그림에서 솔방울을 찾았어요. 하나, 둘, 셋... 아주 많았어요. 그리고 '눈을 굴려서, 눈을 굴려서, 눈사람을 만들자' 동요를 부르면서 놀았어요. 엄마도 함께 눈을 굴렸어요. 여기는 도서관이라서 크게 소리를 지를 순 없었지만, 너무 신나고 재미있었어요. 유아놀이방은 금방 잊어버릴 정도로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 보니 달님과 별님이 숨바꼭질하고 있었어요. "엄마! 하늘 좀 보세요. 달님과 별님이 놀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아빠는 엄마에게 웃으면서 "으이그, 우리 딸, 귀엽다, 그치?" 말했어요. 전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빠, 그걸 인제 아셨어요? 제가 좀 귀여워요. 하하."
<쉰 살 아빠>
내 아버지께선 1942년에 태어나셨다. 아직 바지에 똥을 싸는 일곱 살 때 한국전쟁이 벌어져서 길가에 널린 시체를 밟으면서 소달구지를 타고 피난을 다니셨단다. 그래서 많이 배우지도 못하셨다.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셨고, 나뭇꾼부터 온갖 일을 닥치는 대로 하시다가, 평생 하급공무원으로 개미처럼 사셨다.
아버지는 무서웠다. 가끔씩 살갑게 장난도 치셨지만, 내가 아버지 호주머니에 손을 대서 작은 장난감을 샀을 때, 속절없이 다락방에 끌려가서 전깃줄로 짐승처럼 맞았다. 그리고 비슷한 일이 생겼을 때마다 어두운 다락방에 끌려갔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명백하게 학대에 속하겠지만, 40년 전에는 자연스러웠다.
뒤늦게 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피붙이를 만져보는 내 심장은 분명히 뛰었지만, 어떻게 키워야 할지 잘 몰랐다. 다락방에 끌려가서 팽팽한 전깃줄로 매질을 당했을 때 피부에 새긴 공포가, 아버지가 너무 두렵고 무서웠던 마음이, 내 귀한 딸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될까봐 두려웠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자라난 가족 밖에는 모른다. TV나 드라마에서 본 화목한 가족 모습은 머리 속에서 가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섰지만, 실제 가족 안에서 손과 발은 이성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배운 부모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 그래서 우리는 욕하고, 때리고, 모욕한다. 까르마는 자연 법칙이다.
우리 딸이 '싫어!'라고 크게 외칠 때마다, 내 마음 속에서는 성난 증기 기관차가 달렸다. 거의 매번 KTX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서, 놀랐다. 쇠못이 자석에 가서 탁, 하고 붙듯, 원가족에서 본 대로, 배운 대로, 나는 말하고 움직였다. 내 골수에 새겨진 과거를 하나씩 목격한 고운 아내는 종종 크게 한숨을 쉬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끝없이 실수하고 실패하면서도, 끝없이 시도해 봐야, 아주 조금 바뀔 수 있다. 나도 그랬다. 마음 속에서 증기 기관차가 달릴 때마다 '그래도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는 촛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좋은 아빠는 애초에 될 수 없고, 딸에게 정서적으로 외면받지 않는 아빠면 만족한다.)
하버드 협상 프로젝트에서 유명한 개념 둘을 제시했다. '입장(positions)'과 '이해관계(interests)'. 입장은 겉으로 내 놓는 최종 제안을 뜻한다. 이해관계는 협상 당사자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를 뜻한다. 유능한 협상가는 상대가 내놓은 표면적 제안을 넘어서, 그 사람이 진짜로 원하는 바를 알아챈단다.
우리 딸이 문 닫힌 도서관 유아놀이방 앞에서 '싫어!'라고 외치면서 떼를 쓸 때, 문득 '입장'과 '이해관계'가 떠올랐다. 우리 딸은 이제 겨우 다섯 살이지만 충분히 똘똘해서 엄마, 아빠도 닫힌 놀이방 문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 하지만 아쉽고 아쉬워서 '싫다!'고 외쳤다. '재미있게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본질이다.
그래서 우선 정서적으로 다독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미있게 놀고 싶다'는 감정을 알아줘야 했다. 딸과 눈높이를 맞추고 등을 가볍게 토닥이면서 공감했다. 그랬더니 금방이라도 울고 떼를 쓰려고 찌푸려지던 딸 표정이 금방 평온해졌다. 그리고 '놀고 싶다'는 본질을 받아서, 로비에서 놀고 가자고 제안했더니 배시시 웃는다.
'저런, 또 싫어병이 발동했구만!' 평소에 딸이 울며 떼를 쓰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젠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다. 딸은 다만 '원하는 바를 알아 달라'고 말하고 싶어서 '싫어!'라고 외친다. 만약에 아빠가 이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면, 아무도 마음을 크게 다치지 않으면서, 서로 원하는 바를 충분히 맞춰갈 수 있다.
2026년 2월 25일,
이재원 記.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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