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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처럼 '빵빵하게' 이야기를 쓰는 방법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6. 3. 10. 10:50728x90반응형

"우리가 예약한 삿갓재 대피소에서 연락이 왔다. 출발지를 말씀드리니 8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얘기해 주셨다. 육구 종주 첫날 목표인 20km를 걸었다. 처음 5km는 아주 쉬웠고, 다음 5km는 죽을 뻔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우리는 생존모드가 되어 걷기에 온전히 집중했다. 휴대전화 따위는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두워지기 전에 대피소에 도착하고 싶었다. 마음 속엔 의욕이 넘쳤지만 다리는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후들거렸다. 그렇게 열심히 걷다 보니 멀리 대피소 불빛이 보였다. 그저 감사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생각이 가라앉아 평온해졌다."
(김혜지 사회복지사)
축구공처럼 '빵빵하게' 이야기를 쓰는 방법
이야기를 축구공에 비유해 보자. 글쓰기 초심자는, 어떤 이야기를 쓰려고 할 때 머리 속에 완벽한 공 모양을 띤 축구공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이미 축구공이 있으니 그냥 글로 뽑아내서 옮기면 된다고 기대한다. 하지만 막상 글을 쓰다 보면 특정 부분을 너무 많이 쓰거나 너무 적게 써서, 구멍이 군데군데 뚫린 채로 찌그러진 축구공을 만난다.
왜? 글쓰기는 머리에서 이미 완성된 축구공을 단순히 꺼내는 일이 아니다. 온갖 모양으로 펼쳐진 조각천 수 천 개 중에서 정육각형 20개와 정오각형 12개를 골라내서(삼각형도, 사각형도 안 된다) 서로 잘 안 맞는 면도 최대한 매끈해 보이도록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는 일이다. 이 과업을 수행하려면 일일이 골라내고, 일일이 손질하고, 일일이 꼬매야 한다.
위 이야기를 들여다 보면서 곰곰이 따져 보자. 글쓴이는 최소 여덟 시간에 걸쳐서 일어난 트레킹 일정을 담았다. 현위치에서 삿갓재까지 걸으면서 얼마나 많은 자잘한 사건이 생겼을까? 매 순간 내딛었을 한 걸음부터, 찰나마다 내 쉬었을 숨 한 번과 함께 걷는 사람과 눈빛을 마주친 횟수까지 다 자잘한 사건으로 센다면? 아마도 수백만 건은 족히 넘기리라.
하지만 글쓴이는 그 모든 순간 중에서도 대 여섯 순간만 골랐다. 왜? 마지막 줄에 쓴 주제 문장,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평온해졌다'와 관련이 없는 99.99% 자잘한 사건을 굳이 쓸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야기에 크게 구멍이 났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야기를 구성하는 세부 내용 대부분은 생략해도 괜찮다. 이야기엔 '정말 중요한 내용'만 담는다.
그런데 글쓰기 초심자는 대체로 너무 많이 써서 이야기를 망친다. 왜? 우선, 설계도를 그리지 않고 무작정 현장에 나간다. 그리고 급변하는 상황에 맞춰서 즉흥적으로 시멘트를 바르니, 어디는 지나치게 많이 바르고 어디는 너무 안 바르게 된다. 처음에는 괜찮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건물을 짓다 보면 언젠간 기울어지고, 운이 나쁘면 완전히 무너진다.
다음으로, 어쨌든 설계도 없이 내용을 많이 썼다면 적절하게 줄이면 되는데, 방법을 모른다. 우리는 이야기를 왜 쓰는가? 생각이든 감정이든, 뭔가 중요한 내용(주제)을 전달하려고 쓴다. 그렇다면 주제와 관련이 깊을수록 중요한 내용이고, 관련이 없을 수록 안 중요한 내용이다. 어떻게 줄이냐고? 덜 중요한 내용(주로 세부사항)부터 쳐내면 된다.
위 글에서 주제는 무엇인가? '몸은 힘들었지만, 생각이 가라앉아 평온해졌다' 이다. 이 주제문을 놓고 살펴 본다면, 이 문장 이전 내용은 거의 '몸은 힘들었지만'과 직접 연결된다. 그리고 '어떤 옷을 입고 걸었는지'나 '점심 때 뭘 먹었는지'와 같이 주제와 덜 연결되는 내용은 전부 뺐다. 그래서 위 이야기글은 풍성하게 느껴지면서도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위 글을 쓴 학생에게 내가 감탄하면서 물었다. "우와, 어떻게 이렇게 잘 쓰셨어요? 교과서에 실어도 좋을 만큼 이야기를 딱 떨어지게 잘 쓰셨네요." 학생이 수줍게 답한다. "선생님 설명을 듣고 가죽 조각을 두루 이어 붙여서 축구공을 만든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썼어요. 그랬더니, 짧게 썼는데도 빈 곳이 적게 보이고 빵빵하게 보이네요." (아싸! 내가 잘 가르쳤구나.)
그래서 찾아 봤다. 내가 정확하게 뭐라고 설명했는지. 다행히, 인스턴트 메신저 창에 내가 쓴 문장이 남아 있다. 이야기를 쓰는 과정을 축구공에 적절하게 비유했다. 물론, 학생이 똘똘해서 금방 알아듣고 원칙을 적용해서 거의 '작품'을 써 냈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써 먹으면 좋을 듯하여 내가 쓴 메시지를 곱게 갈무리해서 아래처럼 정리해 보았다:
"머리에 축구공을 떠올려 보세요. 축구공은 가죽 수십 조각을 이어 붙여서 만들죠. 선생님께서 표현하시려는 내용을 축구공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정육각형 20개에 정오각형 12개를 붙인다고 그려 보세요. 32개 가죽 조각을 고루 펼쳐서 붙여야 공 모양이 나타나는데, 어느 한 곳에만 두 세 개를 겹쳐서 붙인다면? 다른 곳에 구멍이 생기겠지요? 군더더기는 이와 같아요. 이야기를 쓰실 때, 설계도를 32면으로 그린 후에, 모든 면을 골고루 다 채워서 쓰면, 딱 떨어지게 둥근 축구공처럼, 풍성하면서도 간결하게 느껴집니다." (이재원 선생 피드백)
2026년 3월 10일
오전에 이재원 記.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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