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겨울이는 도망가질 않아
    지식 공유하기(기타)/슬기로운 의사생활 2020. 6. 11. 20:25
    728x90
    반응형

     

    <슬기로운 의사생활, 제 10화 중에서>

     

    이익준 교수: "혼자서 전공의 1년차부터 치프 일까지 다 하잖아. 근데, 걔는 티를 안내. 힘들텐데. 투덜대고 짜증내도 다 이해할 텐데, 겨울이는 뚱할지언정, 싫다고 도망가거나 투덜대질 않아. 애가 공감 능력이... 매우 조금 많이 떨어져서... 그렇지, 근데 그것도 고칠려고 노력하는 중인 것 같고. 암튼, 수술실에서도 나 걔 연차에 타이 그 정도 하는 애 못 봤어. 그것도 계속 혼자 연습하는 것 같고. 

     

    환자 생각하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거, 서전으로서 마인드가 너무 좋아. 훌륭해."


    얼마 전 지방에 사는 어떤 동료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선생님!!! 잘 지내시져???" 좋은 동료이지만 자주 연락을 나누는 사이는 아닌데? 아니나 다를까, 어찌 지내시냐고 여쭈니, "음... 털고 싶은 경험을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머리는 이해했는데, 마음이 못 따라가니 마음이 고되요" 라고 답이 왔다. 

     

    심상치가 않았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사례관리 하던 어느 노인 분께서 사망하셨다고 한다. 그 분의 배우자 분이 치매를 앓고 계시는데 아마도 배우자 사망 후 열흘 정도 부패하는 시체와 함께 생활하신 것 같았단다.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가 코를 찔러서 차마 방문을 열지 못하셨다고 한다. 경찰이 출동하고 구급차가 와서 시체를 수습하는 뒷 켠에서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하고 계셨다고 한다. 

     

    "어이쿠,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닌데요?" 깜짝 놀랐다. 그 일이 바로 어제(통화 했던 날의 전날) 일어났던 일이란다. 언뜻 드는 생각에, 나 같으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벌렁대서 도저히 출근하지 못할 것 같은데... 당장 일을 때려치우거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일이 돌아가고 말고를 떠나서 그냥 못 간다고 전화를 할 것 같은데... 정상적으로 출근을 하셨단다. 출근 하셔서 계속 울고 계신단다. "아이구야..."

     

    왜 출근하셨냐고,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했으니 지금 상태는 외상후 스트레스 상태라고, 당장 집에 가셔서 드러 누워도 시원치 않으시다고, 어떻게 출근을 하셨냐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그래도 여기 일은 돌아가야 하니까요" 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결국, 책임감 때문에 의미 있는 관계 속에 있던 클라이언트가 썩어가는 냄새를 맡은 충격적 일을 겪은 후에도, 정상적으로 출근을 하셨다는 거다. 

     

    개인적으로는 이분이 출근하는 것이 너무 걱정되고 심지어는 그 와중에도 사무실 일이 돌아갈 것을 걱정하시는 게 솔직히 이해가 잘 안되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았고 내가 모를 뿐이지, 이 세상 어느 한 켠에서는 이분과 비슷한 성정을 가진 우리 사회사업가 동료들이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그야말로 "강력한 책임감 때문에" 출근하기 힘든 극한 상황에서도 출근을 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과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후에, 전화를 끊으면서 "어쨌든 저는 선생님이 다만 며칠이라도 쉬셨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분은 "그래도 제가 없으면 어떻게 될지 뻔한데... 외면할 수가..." 라고 말씀하셨다. 에고, 그놈의 책임감이 뭐라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본인이 아무리 힘들어도, 결국엔 출근할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쉬라는 말을 접고 그냥 응원하는 마음으로 격려의 박수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상태에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다시 보는데, 이익준 교수의 대사가 고막에 강렬하게 와 닿았다: "겨울이는 싫다고 도망가거나 투덜대질 않아. 환자 생각하고 배우려고 노력하는 거, 서전으로서 마인드가 너무 좋아. 훌륭해." 서전, 즉 "외과의사"라는 단어만 "사회복지사"라고 바꾼다면, 책임감 때문에 트라우마적인 사건마저 견디고 계신, 어쩌면 미련하기까지 한 우리 동료의 정체성이 그대로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원조 전문가(helping professional)로서 가져야 할 제일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수많은 가치가 경쟁을 하겠지만, 나는 결국엔 "책임감"이라고 믿는다. 뛰어난 머리, 뜨거운 가슴, 부지런한 손과 발보다 중요한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책임감이다. 지금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자세이다. 때로는 미련해 보이지만 내가 돌보는 사람들, 내가 돌보는 일을 외면치 않는 든든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사회복지사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Social workers change the world)."


    (*덧붙임: 본문에 소개한 동료 선생님께는 이미 상담을 권했고, 필요하시면 제가 가장 존경하는 가족치료자를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멀리 계셔서 힘드시면 전화 상담도 가능합니다.) 


    "다 주거써, 나 말리지 마."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