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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
    지식 공유하기(기타)/슬기로운 의사생활 2021. 6. 2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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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부인과 병실>

     

    양석형: 소아과 선생님 오셔서, 아기는 심폐소생술... 2, 30분 정도 했는데, 아기가 너무 어려서 잘 안됐습니다. 

    산모: (말 없이, 흐느낀다.)

     

    <양석형 교수 연구실>

     

    양석형: (두꺼운 산과 교과서를 펼쳐 보며 첫 장에 붙은 메모지를 마음 속으로 읽는다.) 산과 교과서의 첫 장에 이런 글이 있네요: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 제 2화 중에서>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 제 1화에서 양석형 교수는 생존 확률이 대단히 낮은 아기를 살려 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제 2화에서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 즉, 아기는 하늘나라로 떠나고 만다. 양석형이 산부인과 전공의, 추민하에게 언급했던, '만약에 이렇게 하시다가 아기가 잘못되면 어떡해요?' 라는 질문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 상황에서 양석형 교수는 아기와 산모, 아빠에게 최대한으로 예의를 표시한다. 수술실에서 어떤 일이 생겼는지 담담하게 설명하면서 의사로서 책임을 다하지만, 생명을 살리지 못한 아쉬움과 미안함을 진하게 느낀다.

     

     

    산모와 태아를 도와 주고 싶었어

    <산부인과 병동> 장겨울: 이 환자 분, 잘 하면 성공할 수도 있겠는데요? 추민하: (마우스를 스크롤해서 한 차트 안 다른 기록을 보여 준다.) 장겨울: 음... 이 분은, 조금 힘들겠다. 추민하: 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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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던 중 퇴원하는 산모가 양석형 교수에게 꽃바구니와 메모를 남긴다: "교수님, 김수정 산모에요. 얼굴 꼭 뵙고 퇴원하고 싶었는데, 수술 중이셔서 이렇게 글 남깁니다. 교수님, 어젯밤에 보내주신 문자에 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웃으면서 병원 나가려고 했는데, 교수님 때문에 남편이랑 또 한참 울었네요. 교수님, 미안해하지 마세요. 교수님 덕분에 지난 한 달 동안 아기 심장 소리도 듣고, 태동이라는 것도 처음 느껴봤어요. 그 짧은 몇 주의 시간이, 저와 제 남편에겐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교수님은 모르실 거에요. 교수님, 혹시라도 제게 다시 천사가 찾아온다면, 그때도 꼭 저와 우리 아기 맡아서 지켜 주세요. 정말 고생 많으셨고...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 보내주신 문구는 남편이 벌써 출력해서 액자로 만들었어요." 

     

    산모가 보내 온 편지를 다 읽은 후, 양석형 교수는 두꺼운 산과 교과서를 연다. 그리고 이 책 첫 장에, 양석형 교수가 산모에게 보냈던 문자 메시지가 적혀 있다: 산과 교과서의 첫 장에 이런 글이 있네요: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YB 노래, "가을 우체국 앞에서" 중에서)


    몇 년 전, 모 대학교 학부 과정에서 가족치료 과목을 강의했다. 사실, 가족치료 과목은 학부생 수준에서는 조금 어려운 내용인데, 학생들이 무척 똘똘해서 잘 따라와 줬다. 참 기특했다. 그런데 신나게 가르치고 있던 어느날, A 여학생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A: "교수님!!! 저 시간 되실 때, H학우랑 밥이나 술 사주시면 안될까요? 제가 가위바위보에 져서 말씀 드리기로 했어요. 혹시 안되시면 어쩔 수 없지만요. 하하하" 

    나: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를 한 경위를 밝히시오. ㅎㅎㅎ

    A: 교수님이랑 술 마시고 싶다고 서로 얘기를 하다가, 제가 총대를 멨어요. 하하하. 

    나: 용기가 가상해서 사 주는 걸로. 단, 장소는 제가 정합니다. 시기는 중간고사 끝난 후에. 

     

    귀여웠다. 직감적으로 어떤 학생인지 알 것 같았다. 순수하게 밥/술을 사달라는 대학생 커플에게 기꺼이 돈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약속을 잡았다. 남자 친구와 함께 오면 맛있는 곳에 데리고 가서 잠시나마 편하게 시간을 보내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중간고사 바로 전날, 어떤 여학생에게서 긴급한 문자 메시지가 왔다: "교수님, 제가 어젯밤에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제가 XX증 진단을 받았는데요, 상태가 안좋아져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응급실로 입원했다가 현재는 퇴원해서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지만, 시험을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정말 깜짝 놀랐다. 이제 21살이 된 아가씨가 어째서 스스로 세상을 등지려 했나? 일단, 중간고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다행히, 학생이 학기를 마치겠다는 의사를 밝혀서, 그렇게 하라고 지지해 주었다. 학교 당국과 상의하여 중간고사 문제를 새로 만들어서 시험도 다시 치루게 도와 주었다. 그리고 기말고사 기간이 끝나자마자 연락을 했다: "이재원입니다. 기말이라 바쁘지요? 시험 끝나는 대로 오세요. 맥주 한 잔 사리다."

     

    그렇게 해서 A와 H를 만났다. A는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하얗고 뽀얀 얼굴로 나타났고(피부가 참 예뻤다), 그 옆에는 다소 마른 체형에 순하게 생긴 청년 H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나는 자주 가는 수제 맥주집에 두 사람을 데려가서 맥주를 샀다. "지난 번 이야기 해도 되겠니?" 라고 조심스레 물어보고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A는 병원에서 XX증 진단을 받아서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중간고사 직전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가 안좋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A가 나에게 불쑥 질문을 했다: "교수님, 근데요... 제가 고민이 하나 있어요. 말씀 드려도 될까요?" 말을 해 보라고 했더니, 닭똥 같은 눈물부터 흘린다. "샤이니, 종현이라고 있었어요. 제가 엄청나게 좋아했는데요, 하늘나라로 가 버렸어요. 그 상실감이 너무 커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모르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다. 

     

    이렇게 답했다: "나는 샤이니도 모르고, 종현이라는 사람은 더욱 몰라. 그 사람 노래도 모르고 팬덤도 몰라. 지금 들어 보니, 네가 가족처럼 가깝게 느끼는 사람이었던 것 같네. 그러니까 너는 무척 견디기 힘든 상실을 경험한 건데...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고, 내 경험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네. 나도 몇 년 전에 심각한 상실감을 경험했어. (생략) 당시에는 정말 끔찍했지. 죄책감, 분노, 쪽팔림 등등으로 정말 매일 죽고 싶더라구. 그런데 이겨냈어. 어떻게? 글쎄... 나 같은 경우엔,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옆에서 있어줄 친구 두 명 덕분에 견뎌 냈던 것 같아. 종교가 있다면 의지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자기가 견뎌야 할 부분은 남는 것 같아. 당시에는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시간도 흐르고 나도 점점 괜찮아졌지."

     

    이 대목에서 A가 아동 분야에서 사회사업을 하고 싶다고 말한 내용이 생각났다: "아, 너 아동을 돕고 싶다고 했지? 아주 좋은 비전이야. 아까 자원봉사 활동 했던 이야기를 들어보니, 네가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사회사업가로서 자질이 풍부한 것 같아서 좋았다. 아동을 아동으로 순수하게 대하되, 인격을 존중하고 싶다고 말했잖아. 아무튼,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끔찍한 상실감을 견디면서, 세상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고, 이런 생각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고 있거든. 나는 네가 멋진 사회사업가로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너도 지금 겪고 있는 이 상실감이 나중에 사회사업가로서 (네가 원하는 바대로) 아동을 돕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네가 겪고 있는 상실감에도 의미가 있다고."

     

    내가 해 준 말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 험하고 각박한 세상 속에 A를 걱정하고 응원하는 사람이 한 사람쯤 더 있다는 사실을 전할 수 있었다면, 그래도 보람있을 것 같다.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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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배우는 원조전문가의 태도(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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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내 1:1 제자, 안혜연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아이돌 멤버를 마치 가족처럼 가깝게 느끼는 청소년의 심리에 대해서 통찰을 얻었다: "모두 그런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특정한 아이돌 멤버 외에는 내 편이 없었을 수도 있어요. 더구나 종현이는 SNS를 통해서 팬들에게 아주 소탈하게 다가갔던 친구고, 그래서 실제로는 멀리 있는 사람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아주 가까운 사람처럼 느낄 수도 있는 거죠. 이게 다 이미지고 환상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연예인을 친밀하게 느끼는 친구가 겪어온 삶이 어렵고 외로웠을 수 있다는 거죠." 듣고 보니, 더욱 짠~하다. (불쌍하다는 말, 아니다. 그 마음을 더욱 공감하게 되고, 그의 미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많이 든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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