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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지고 보면, 사회복지사가 상담을 제일 잘 한다 (두 번째 글)
    지식 공유하기(해결중심모델)/해결중심 고급 테크닉 2022. 12. 2.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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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따는 소리] 띠띠띠띠~ 
    나: (크게 당황해서 옷을 챙겨 입으며) 엥? 누구지? 
    아버지: (문을 여시며) 재원아~
    나: 아버지? 언제 오셨어요? 
    아버지: (말 없이 집 안을 둘러 보셨다) ... 
    나: (갑자기 벌컥 화를 내며) 아니, 왜 오셨어요? 그리고, 비밀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2014년 여름부터 2019년 봄까지 만 4년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실업자였다. 3년째 다니고 있던 장애인복지관에서는 자의반 타의반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자의반: 개인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신체적 건강도 급격히 악화되었고 - 몸무게가 20kg이나 빠졌다, 타의반: 직장에서 거의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기 때문에 끝내는 사직을 권고 받았다.) 그 이후부터 나는 거의 누워서 지냈다. 진짜다. 거의 매일, 누워서 자다가 깨다가 자다가 깨다가 겨우 책만 읽으며 몽롱한 상태로 살았다.

    30대 말부터 40대 초중반까지 세상을 등지고 삶을 거의 포기한 채 혼자서 외롭게 지내는 아들이, 부모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지금도 기억나는 어머니 말씀: "일을 안 하면, 죽어야 해." 평생 밑바닥 노동자로 일해 오신 부모님께서는, '사지가 멀쩡한데 놀고 있는' 아들이, 분명히 피가 나고 있는데 몸에 너무 깊이 박혀 있어서 도저히 뺄 수 없는 유리 조각 같이 아픈 존재로 여겨졌을 터. 다 큰 아들 어쩌지 못해 외면하려고 해도, 매일 밤 떨어지는 눈물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상처였을 터.

    곰곰 생각해 보면 나도 아버지 만큼이나 양가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혼자서 하루 종일 누워 지내고, 하루 한끼 겨우 챙겨 먹으면서 집에만 갇혀 있는 시간이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부모님, 누나들, 친구들, 모두 많이 보고 싶었다. 망가진 내 영혼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 만큼, 손을 내밀어서 도움을 청하고, 교류하며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상 구석에 아무렇게나 찌그러져 있는 내 모습을 보여줄 용기가 도저히 나질 않았다. 그냥 그렇게 숨 죽여 살아만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께서 내 집 문을 따고 들어오셨다. 아마도 3년차 초반이었던 것 같다. 오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미처 눈꼽도 떼지 못하고 며칠 동안 머리도 못 감아서 냄새나는 새집이 앉아 있는 꼴이었다. 나는 마음 한 편으로는 무척 반가웠지만, 언제나처럼 일방적으로(최대한 좋게 말하자면, 그다지 부드럽거나 세련되지 않은 방식으로) 밀고 들어오시는(최대한 좋게 말하자면, 관심을 표현하시는) 아버지 태도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무례한 말투와 행동으로 아버지를 밀어 냈다. 

    지난 글에서 나는 "따지고 보면, 사회복지사가 상담을 제일 잘 한다"고 단언했다. 오해하지 마시라. 이 문장은 사회복지사를 다른 원조 전문가 집단과 나란히 세워 두고 직접 비교한 표현이 아니다. 사회복지사가 일하는 환경과, 사회복지사가 만나는 (비자발적인) 클라이언트 집단은 다른 원조 전문가가 일하는 환경이나 그들이 만나는 (자발적인) 클라이언트 집단은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사회복지사가 다른 원조 전문가보다는 훨씬 더 제대로, 잘, 사회사업 클라이언트와 상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복지사는 사회사업 환경에 맞게, 그리고 사회복지사답게 상담하는 방법을 익히고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뭔가 있어 보이는' 고급 상담 기술을 배울 시간적 여유도 없지만, 열심히 배운다고 쳐도, 제대로 적용하기란 매우 어렵다. 사회복지사는 지엽적인 '상담 테크닉'에 대해서 목을 맬 것이 아니라, (사회사업) 클라이언트가 가지고 있는 좀 더 근본적인 태도나 관점에 대해서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 (사회사업) 클라이언트의 마음이 대단히 복잡/미묘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복잡/미묘한 마음 중에서도 우리는 '양가감정'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회사업) 클라이언트는 도움을 받고 싶으면서도 받고 싶지 않다. 연락을 취하고 싶으면서도 실제로 연락하고 싶진 않다. 친절하게 대하고 싶다가도 친절하게 대하지 않고 싶다. 함께 정한 여러 가지 약속을 모두 지키고 싶으면서도 그럴 수가 없다. 왜? 이유는 수백가지, 아니 수천가지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이, 클라이언트가 품는 양가감정도 발생 원인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저를 배척하시는 것 같아요."
    "연락이 되었다 안 되었다 해요."
    "막상 만나면 짜증을 많이 내세요."


    사람은 언어로 생각한다. 현대 철학 끝판왕이 언어철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언어는 한계가 많아서 사물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대상이 가진 수백, 수천가지 특성 중에서 딱 한 두 가지만 뽑아내서 그 대상을 규정한다. 그래서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 과정과 태도가 중요하고, 결과물인 이름도 중요하다. 우리가 부분적으로만 확인한 언행에 '배척하는 사람', '연락이 안 되는 사람', '짜증을 내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그 사람은 그냥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린다. 다른 가능성이 막힌다. 

    나는 해결중심상담이 만병통치약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결중심상담을 공부해 오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해결중심적 태도는 상담 과정에서 크게 도움이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태도가 '알고 싶어하는 자세'다. ('알지 못함의 자세' 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알고 싶어하는 자세'가 좀 더 좋은 번역어다.) '알고 싶어하는 자세'는 내가 전문가로서 알고 있는 지식/정보나 전문가로서 쌓아온 경험/식견을, 내담자의 지식/정보, 경험/식견보다 절대로 우선시 하지는 않겠다는 선언이다. 

    전문가가 중요시 하는 이성적 논리에서는 '일관성'이 중요하다. 말과 행동은 앞 뒤가 맞아야 하고, 이랬다 저랬다 하면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클라이언트가 한 쪽 면을 조금 많이 보여주면, 그 면(만)으로 그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우리 생각과 판단을 앞세우면서, 그를 '비자발적인 클라이언트'라고 규정짓는다. '전문가인 우리 말을 들어야 하는데, 최소한 우리에게 수용적인 태도를 보여야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혹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우리를 배척하는 사람'이라고 보는 셈이다. 

    일단, 이렇게 규정짓고 나면, 우리 눈에 그런 면만 보인다. '나를 계속 배척하는 것 같고', '연락이 되었다 안 되었다 하는 것 같으며', '막상 만나면 짜증을 많이 내는' 모습만 보인다. 하지만 2년 반 만에 처음 아버지 얼굴을 본, 그래서 한 편으로는 무척 반가웠지만, 일방적으로 느껴진 부분이 너무 싫어서(이 부분도 기나긴 역사적 배경이 있다) 격렬하게 배척하는 말과 행동을 보였던, 바로 내 사례를 생각해 보시라. 나는 아버지를 배척했나? 일정 부분 그렇다. 나는 아버지가 무조건 싫기만 했나? 아니다. 결코 아니다. 

    '따지고 보면, 사회복지사가 상담을 제일 잘 한다'는 말을 맞는 말로 만드려면, 그대가 현장에서 세심하게 고민을 해야 한다. 나를 만나는 저 사람이 내게 보이는 부정적인 언행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저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는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 강렬한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 나에게 보이는 모습이 저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신중하면서도 정중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로 사회복지사가 상담을 제일 잘 하는 원조 전문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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