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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우리집에 왜 왔어?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3. 2. 10. 08:40728x90반응형
외지인으로 제주에 내려와 애기 해녀가 되어 일하고 있는 영옥. 물질하는 해녀를 바다로 데려다 주는 일을 하는 선장, 정준. 바로 앞 장면에서, 정준이 영옥을 어떤 상황(?)에서 구해 주었다. 동네 남자가 영옥을 괴롭히고 있었는데, 정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뿅~) 나타나 막아 주었다. 다소 묘한(?) 분위기 속에서 영옥과 정준이 함께 바닷가를 산책한다. 두 사람, 썸을 타나?
영옥: 아까, 우리집에 왜 왔어?
정준: 그냥.
영옥: (나와 함께 사는) 은희 언니한테 용건 있었어?
정준: ... (대답을 못 한다.)
영옥: (갑자기 정준 앞으로 나서며) 말해 봐. 왜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우리집 앞에 딱 나타난 건지.
정준: (옅은 미소를 띈 채 말 없이 영옥을 바라 본다.) ...
영옥: (마찬가지로 미소를 띈 채 정준을 바라 본다. 답을 기다린다.)
정준: (말 없이 미소를 보낸다. 입으로는 답을 못하지만, 얼굴로는 노골적으로 답한다.)
정준: (빤히 쳐다보고 있는 영옥을 지나쳐 다시 걷기 시작한다.)
영옥: (정준 마음을 알겠다는 듯) 으흠~
제주도를 무대로, 다양한 사람들이 엮어내는 달고, 짜고, 쓰고, 매운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 '우리들의 블루스.' 그 중에서 영옥(한지민)과 정준(김우빈)이 이제 막 썸을 타려고 하는 장면을 가져왔다. 대본을 쓴 작가와, 영상으로 만든 PD 솜씨가 워낙 좋아서, 넋을 잃고 빠져들어 보게 되는, 정서적으로 미묘하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장면이다.
드라마는 시청각 매체이므로, 세 가지 정보를 동시에 제시한다: 텍스트 정보(대사), 시각 정보(두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 청각 정보(소리). 먼저, 청각 정보(소리)는 제주라는 장소와 한밤중이라는 시간을 배경에 깔아준다. 다음으로, 시각 정보(두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가 더해진다. 닿을 듯 말듯, 설레이는 감정을 느긋하게 걷는 모습과 서로 뚫어지게(?) 지켜보는 행동, 그리고 지그시 떠올리는 미소로 전달한다. 마지막으로, 텍스트 정보(대사)가 이 미묘한 분위기를 거의 확실하게 전달한다. 최소한 두 사람은 서로 상대에게 관심이 있다. 좋은데, 두 사람 모두 어떤 이유에서든지 멈칫, 주저하고 있다.
다시 화제를 좁혀서, 드라마 PD가 시각 정보를 제시하는 방법을 분석해 본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시각 정보는 화면 크기다. 첫 번째 컷(풀샷)을 보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부 보이는 두 사람이 해변가를 걷고 있다. 이 컷을 보면서 관객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리라: '아~ 정준이 영옥을 구해 준 후에, 자연스럽게 밤산책을 하고 있구만.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두 사람, 이제 본격적으로 썸을 타려나?' 이제, 두 번째 컷을 보라. 뒤에서 두 사람을 좇아가던 카메라가 앞으로 나왔고, 좀 더 다가가서 찍는다(미디움 샷). 첫 번째 컷에서는 대사가 없었지만, 이제 대사가 나온다. 영옥이 정준을 슬쩍 떠 보는 세 번째 컷을 지나서 네 번째 컷에 도달하면 카메라가 등장 인물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클로즈업 샷). 분위기는 고조되고, 관객은 본격적으로 두 사람 사이를 오고가며 궁금해 한다: '옴마나, 정준이 마음을 내비칠까? 정준아~ 말해~ 영옥 누나가 좋아서 집으로 온 거라고!' 하지만 진지한 청년, 정준은 아직 마음 준비가 덜 되었다. 남자와 가볍게 만나고 다니는 (듯 보이는) 영옥이를 믿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마지막 컷은 다시 풀샷. 정준은 마음을 열지 않았고, 영옥이는 분위기로 딱, 알아챈다: '이 남자, 아직 내 남자 아니야.'
드라마 PD가 화면 크기를 어떻게 활용해서 시청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했나? 처음에는 풀샷 크기 화면으로 주인공이 전체적인 시간/공간 정보를 제공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낼 준비 단계다. 두 사람 사이에 의미 있는 대화가 오고가는 단계가 되자, 카메라가 등장 인물에 좀 더 근접한다. 이전 컷을 통해서 시청자가 배경을 자연스럽게 수용했으므로, 이야기를 한 단계 더 진행시킨 셈이다. 그리고 클로즈업 샷을 통해서 이 장면에서 핵심 내용이 되는 두 사람 관계를 보여준다.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영옥은 다가오는 정준의 마음을 알아챘는가? 정준의 마음을 받아 줄까? 진지한 청년, 정준은 어떤가? 계속 영옥에게 다가갈까? 그러다가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이 장면을 글로 쓴다면 어떨까? 영상과 글은 엄연히 다른 매체이고, 사용하는 도구도 약간 다르지만, 본질은 비슷하다. 드라마 PD가 화면 크기를 활용해서 이야기를 큰 덩어리에서 작은 덩어리로 쪼개면서 이어 나갔듯이,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통해서 이야기를 큰 덩어리에서 작은 덩어리로 잘라서 전개한다. 먼저,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와 시간을 소개한다. 그리고 등장 인물을 소개한다. 그 다음에는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서술하고, 서로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을 묘사한다. 마지막으로 대화 내용을 직접 인용하면서 미묘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큰 덩어리에서 작은 덩어리로, 배경 이야기에서 핵심 이야기로. 어떤 사건에 대해서 서술하는 글에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순서다. (일반적으로) 독자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모른다. 따라서 그 사람에게 생소한 사건을 글로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순차적으로 내용을 기술해야 한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소개 없이, 등장 인물에 대한 소개 없이, 이야기를 전개하면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 가지를 배격해야 한다. 첫째, 자연스러운 순서를 무시하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다짜고짜 이야기하는 방식. 낯선 사람과 만났다고 생각해 보라. 서로 인사도 안 했는데, 상대가 본론부터 꺼내면 어떨까? '뭐야, 이 사람? 왜 갑자기 훅 들어오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무례하게 느껴져서 그 사람이 꺼내는 중요한(?)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리라. 둘째, 생각나는 대로, 온갖 자초지종을 구구절절 장황하게 늘어놓는 방식. 생각나는 대로, 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생각하지 않고 쓰는 방식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바, 자신이 경험한 바를 독자에게 중요하다고, 재미있다고 설득하고 끌어 들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를 다 꺼낸다고 독자를 설득하지는 못한다. 효율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요컨대, 어떤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적절한 순서(큰 덩어리에서 작은 덩어리로, 배경 이야기에서 핵심 이야기로)에 따라서, 효율적으로(독자에게 의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만 선택해서) 이야기를 써야 한다. 이제, 다시 한 번 위 드라마 장면으로 돌아가서, 영옥과 정준이 만드는 미묘하고 달콤한 썸 타는 이야기를 찬찬히 음미하며 읽어보라. 그리고 그대가 경험한 이야기를 적절한 순서에 따라 효율적으로 써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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