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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유모차지식 공유하기(기타)/글쓰기 공부방 2023. 11. 9. 05:46728x90반응형
쓰러진 유모차
글쓴이: 박지선(서울시 어르신돌봄종사자 종합지원센터 연구원, 2023)
첨삭 지도: 이재원(강점관점실천연구소, 2023)
매주 화요일 오전 나는 OO 대학교 박사과정에서 공부하시는 성직자 분들에게 고급 통계 분석 방법을 가르친다. 오늘, 수업이 끝나갈 무렵, 한 분이 먼저 일어나야겠다며 양해를 구하신다. 친구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덧붙이신다.
"중학교 동창 남편에게 전화가 왔어요. 친구가 교통사고로 지금 수술실에 들어갔다고요. 병원으로 와 줬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친구 남편이 지금 패닉 상태인 것 같아요. 친구가 아침에 5살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대요. 친구는 지금 임신 6개월차인데 임산부와 태아 모두 위중하다고 하네요. 게다가 (더 난감한 건) 양가 부모님이 환갑을 맞아 지중해 쪽으로 크루즈 여행을 떠나셔서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해요. 제가 성직자여서인지 급한 대로 저에게 전화를 한 것 같아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다들 무슨 그런 일이 다 있느냐며 빨리 가보라고 한다. 나에게 닥친 일이 아님에도 상황이 너무 생생하게 와닿아서인지 몸이 떨린다. 수업이 거의 끝나가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수업을 막 시작했을 때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떨려서 제대로 수업을 이어가지 못했을 테니까.
사고당한 가족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아침을 보냈으리라. (을 것이다.) 점점 무거워져가는 몸으로 남편 출근 준비를 돕고, 다섯살 아이를 깨워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분주하게 뛰어다녔으리라. (등원준비를 시켰을 것이다.) 오늘따라 유모차 타고 가고 싶다는 아이 고집에 못 이겨 유모차에 태우고,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늘상 다니던 길을 걸었으리라. (을 것이다.) 그러다 미처 예측하지 못한 사고를 만나서 다섯살 아이와 제 몸을 지킬 틈 없이 불행한 일을 겪게 되었으리라. (을 것이다.)
몇 시간 후 임산부와 태아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늘 하루종일 사고소식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서른 살 넘은 젊은 부부 일이어서인지 괜시리 남겨진 가족 분들이 걱정스럽다. 회사에 있다가 갑작스럽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남편은 심정이 어땠을까. 크루즈여행 중 또는 여행에서 돌아와 딸과 며느리, 손자 사망 소식을 듣게 될 양가 부모님은?
이리저리 생각하다 보니 문득 삶이 허무해진다. 억겁의 시간 가운데 인간 삶은 고작 찰나에 불과하다는데... 갑자기 아등바등거리는 내 모습에 시선이 닿는다. 40대. 스스로 ‘하루살이’라고 규정하며 현재 처한 상황에 맞춰 숨가쁘게 달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쳇바퀴 속 다람쥐’라고 여기며 당분간은 지금 같은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고 단념했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압박감을 느끼며 여유는 나중에 부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따라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맑다. 짙푸른 하늘이 꼭 내 마음 속에 시퍼렇게 든 멍 같다.
<안내>
_ 본 글을 쓰신 박지선 연구원님에게 공식적으로 사용 허락을 받았습니다. (교육 및 출판 목적)
_ 박지선 연구원님께서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글쓰기 클래스 '글로위로' 심화반에 참여하셨습니다.
<이재원 선생 피드백>
1. 아주 잘 쓰셨습니다. 역시, 글발이 죽지 않았군요. 딱 박지선스럽게, 잘 쓰셨습니다. 선생님처럼, 이 글도 조금 수줍어하고, 진지하며, 순수하고, 섬세합니다. 저는 글쓴이가 본인 개성을 잘 담은 글을 읽으면,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낍니다. 첫 독자로서, 지도(글)에 그려진 길(소재/주제)을 따라 걷다가, 글쓴이가 내면에 숨겨 놓은 금은보화를 문득 발견하는 느낌이랄까요. '해방감'... 그래요. 저는 이 묘한 해방감 때문에, 학생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돕는 이 선생 일을 사랑합니다.
2. 소재 자체도 좋지만, 이 좋은 소재를 본인 삶으로 끌고 들어와서 간결하면서도 깊게 고민하신 과정이 대단히 훌륭합니다. 누가 갑자기 죽는 모습을 목격하거나 들으면, 자연스럽게 삶을 허무하게 느낄 수 있지요.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정답을 찾을 수 없으니, 허무하게 느끼면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요. 하지만 글을 쓰시면서 밀도 높게 고민하신 티가 나서, 결론이 어정쩡하거나 허무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라도 가슴팍에 든 멍, 이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할 테니까요.
3. 그동안 박지선 선생님께서는 문장을 아주 많이, 긍정적으로 고치셨습니다. 제가 수업 시간에 가르쳐 드린 내용을 상당 부분 자기 것으로 소화하셨어요. 원래 성인이 되면, 무엇이든 기존 방식을 고치기가 거의 불가능한데, 박지선 선생님께서는 꾸준히 고치셨으니, 엄청나게 의지가 강하다고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고치셔야 할 습관이 흔적처럼 남았습니다. 저는 박지선 선생님께서 글을 좀 더 우아하고 아름답게 쓰시길 원하니, 더 노력하셔서 마저 고치시길 바랍니다.
<좀비 같은 '것'>
(a) 더 난감한 건
'더 난감한 건'은 원래 어떤 형태였을까요? '더 난감한 것은'입니다. 그리고 한 번 더 생각한다면, 생각 속 원형은 '이 부분이 더 난감하다'였겠지요. 왜 이렇게 (의미상) 문장 형태로까지 복원했냐면요, 결국 '~라는 건' 이 어구도 'to 부정사(명사적 용법)' 즉, 동사(구)를 억지로 명사로 만드는 영어식 어법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어는 동사가 발달했고, 다채롭게 동사를 살려서 써야 생기가 돕니다. 따라서 이 '라는 건'도 가급적 없애야 좀 더 곱게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b) ~을 것이다
아, 여기에서도 '것'이 등장했습니다. '~을 것이다' 표현도 우리가 참 많이 쓰는데요, 역시나 'to 부정사(명사적 용법)'에 속합니다. 이 '~을 것이다'를 어떻게 순화해야 좋을까요? '추정' 의미를 나타내는 선어말 어미 '겠'을 쓸 수도 있습니다. '~였겠지' 혹은 '~했겠지' 라고 쓰는 방법입니다. 혹은, 제가 사용한 '~으리라' 어미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쉽진 않겠지만, 이렇게 꾸준히 영어식 어투를 발굴하고 고쳐 나가신다면, 훨씬 더 곱게 한국어를 구사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4. 처음에 주셨던 원고에는 제목이 없었지요. 어떤 제목을 제안할까 고민하다가, 마지막 문장, ' 짙푸른 하늘이 꼭 내 마음 속에 시퍼렇게 든 멍 같다'를 선택했습니다. 이 문장에는 소재에 대한 핵심 생각, 다시 말해서 주제가 잘 드러나니까요. 그러나 너무 긴 듯했고, 독자로서 호기심이 덜 듯하여,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럴 때는 소재를 슬며시(부분이든 전체든) 드러내는 방법이 좋기 때문에, 소재(쓰러진 유모차)를 제목으로 붙였습니다. 두 생명이 사라져간 상황 자체는 너무 선정적이라서 피했고요. (제목 붙이는 감을 익히시라고 굳이 설명했습니다.)
<평범한 사회복지사들이 글로써 소박하게 자기 삶을 정리한 이야기>
<50주 동안 이어질 강점관점실천 공부 자료 나눔 프로젝트>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강의/자문/상담 문의는?>
강점관점실천연구소 이재원
(010-8773-3989 / jaewonrhi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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