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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데 없는 말을 하라고지식 공유하기(기타)/슬기로운 의사생활 2021. 7. 18. 06:31728x90반응형
<산부인과 양석형 교수 연구실>
채송화(신경외과 교수): 너는 일단, 말을 많이 해.
양석형(산부인과 교수): 나, 할 말은 다 해. 필요한 말은 다 하는데?
채송화: 쓸 데 없는 말을 해야지. 할 말만 하는 건 일이고. 쓸 데 없는 말을 하라고. 네가 생각하기에 쓸 데 없는 말이라도, 그게 쓸 데 없는 말이 아닐 거야. 아무한테나 그러진 말고, 어... 일단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자주 보고, 네가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부터 시작해.
양석형: (휴대 전화 울리자) 어, 민하야.
추민하(산부인과 전공의): 교수님, 아~ 다 음 주에 한승주 선생님(간호사) 생일인데, 저희 지금 회비 걷고 있거든요. 어, 교수님은 그래도 교수님이시고 부자시니까, 10만원 내세요.
양석형: 어, 그래. 10만원 할게. 저, 그리고... 민하야. 선물은 뭐 할 거야?
추민하: 어... 아직 고르진 못했는데요, 제가 대표로 이번 주에 백화점 가서 사려구요.
양석형: 아... 어느 백화점? 어느 백화점 갈 건데? 뭐 타고 갈 건데? 전철? 아... 몇 호선 타? 아, 3호선? 그래. 전철이 빠르겠다. 선물은 뭐, 뭐 살거야?
여러분은 누구나 해결중심 질문을 구사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 해결중심모델 전문가일 수도 있다. 해결중심모델을 배우지 않았거나, 심지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조차 없어도 그렇다. 너무 대담한 주장인가? 내 생각은 다르다. 매우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본다. 이제부터 근거를 들어 보겠다.
우선, 한국 문화는 관계 지향적이다. 흔히, 한국 문화를 집단주의 문화 범주에 넣곤 한다. 그러나 한국 문화에서는 집단 그 자체가 중요하기보다는 사람들과 맺는 실질적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한국인은 허다한 모임 속에 자신을 집어 밀어 놓고 산다. 외향적이든 내향적이든 한국 사람이라면 모임을 중시한다.
모두 대학 시절을 떠올려 보라. 어디 경치 좋은 곳에 놀러 가서 모닥불 피워 놓고 둘러 앉아 밤이 새도록 친구와 이야기 나누어 본 기억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있을 거다. 개인주의자이고 술도 잘 못 마시며 친구도 많지 않은 나조차도 이런 기억은 있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말하고 또 말해도 계속 할 말이 떠오르고, 묻고 또 물어도 계속 던지고 싶은 질문이 샘솟던 밤.
온갖 대화와 질문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를,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상대에 관해서 품는 순수한) 호기심. 나는 친구를 인간적으로 좋아했고, 그래서 그가 느끼는 감정이나 머리 속에 굴리고 있는 생각이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것 같다. 지치지도 않고 질문했던 것 같다. 밤새도록 질문했던 것 같다.
썸을 탈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모하는데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미국과 중국 간 갈등 이슈나 도쿄 올림픽 개최 관련 뉴스를 화제로 띄울까? 아니면, 생활 속 소소한 이야기를 툭툭 던지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까? 아마도 소소한 이야기를 화제 삼아 내 이야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질문도 하게 될 터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본격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에게 질문을 많이 하게 된다. 왜? 간단하다.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게 너무 너무 궁금하기 때문이다. 질문에 관한 답을 들어도 들어도, 또 궁금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품게 되는 순수한 호기심이란 그만큼 강력하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 에피소드 05에 나오는 장면. 소통에 실패하고 있다며, 성격 탓을 하는 친구(양석형)에게 채송화는 ‘가까운 사람에게부터 쓸 데 없는 말을 하라’고 조언한다. ‘본인에겐 쓸 데가 없어도, 그에겐 쓸 데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아마도, 양석형이 워낙 진지하고 사회적으로 소심한 사람이라서 이런 조언을 했으리라. '작고 사소한, 그리하여 쓸 데 없다고 여겨지는 일을 이야기'하는 행위는 호기심에서 나오기도 하고 거꾸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접촉면을 늘려 가면 사람들과 공유하는 기억도 늘어날 테고, 종국에는 자연스럽게 편안한 관계망이 생겨나고 두터워질 테니까.
너무 진지한 사람이라서, 친구가 해 준 조언을 바로 행동에 옮기는 양석형. 매일 보는 전공의 학생(추민하)이 전화를 걸어오자 '쓸 데 없는 말'을 꺼낸다. 그런데 하필이면 양석형이 '쓸 데 없는 말'을 하는 방식이 '질문'이다. 질문이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내가 뭘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무엇을 잘 알기 위해서, 그 무엇을 잘 아는 사람에게, 그 무엇에 관하여 정보를 요청하는 언어 형식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면, '너는 그걸 잘 알고 있잖아', '나는 그걸 모르거든', '그걸 나에게 알려 주지 않으련?', '나는 네 답변을 진지하게 들을게' 이런 태도를 동시에 전달하는 셈이 된다. 좀 더 쉽게 요약하자면, 질문을 하면 나는 (그것을 모르는 사람으로) 겸손하게 낮추고, 상대는 (그것을 아는 사람으로) 존중하고 높이는 결과가 일어난다.
양석형이 채송화에게 조언을 듣자마자 추민하에게 사소한 사항에 대해서 질문을 이어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무릎을 탁, 하고 쳤다: "어머머... 이 장면이야말로, 내가 하고 다니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데?"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배우는 원조전문가의 태도>
모든 상담 모델에는 '시그니쳐 테크닉'이 있다. 보통, 서명(시그니쳐)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독특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된다. 이처럼 상담 모델도 그 모델에서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정체성을 대표하는 테크닉이 있는데, 이를 시그니쳐 테크닉이라고 부른다. 해결중심모델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존 상담 모델과 다르지만, 사람들이 가장 널리 알고 있는 해결중심모델 시그니쳐 테크닉은 '기적질문'일 터이다. 해결중심모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기적질문'은 들어봤다고 말할 정도다.
헌데, 기적질문은 책에 실려 있는 서너 줄 짜리 기본형 질문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이 발생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에 나오는 기적질문은 비유컨대 건물에 달려 있는 입구/문에 불과하다. 그대와 절친한 친구가 양지 바른 언덕 위에 예쁜 2층집을 지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어느 날 그 집에 초청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대는 호기심을 가득 안고 친구 집에 방문할 것이다. 그런데 친구 집에 도착한 그대가 만약 입구에서 친구에게 가볍게 인사만 하고, 문을 조금만 연 후에 집 안을 슥~ 둘러 보고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친구는 매우 당황스러워할 것이다.
기적질문은 대화를 시작하도록 도와 주는 문에 불과하다. 그대는 그 문을 열고 친구 집으로 들어가서 집안을 탐색해야 한다. 1층부터 2층, 그리고 옥상부터 지하실까지 모조리 들어가 보고 물어봐야 한다. 절친한 친구가 멋진 집에 초대를 했는데 현관 문만 열어보고 돌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아울러, 만약에 그대가 이 친구에게 관심이 있고 호기심이 있다면, 수십, 아니 수백 가지 질문을 그에게 퍼부을 것이다. '벽지 색깔이 좋은데 어디에서 구했냐?'는 아주 사소한 질문부터 '공사 계약은 어느 회사와 어떻게 했느냐?'는 중요한 질문까지, (말리지만 않는다면) 끝없이 질문을 던질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해결중심모델을 배우려고 한다. 당사자가 원하는 바에 초점을 맞추려는 강점관점실천도 점점 더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해결중심모델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적질문, 무슨 질문, 무슨 질문 등을 익히고 외우는데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 마음, 내가 안다. 아마도 특정한 질문을 멋지게 구사해야 해결중심모델을 제대로 배워서 적용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일정 부분은 이 생각이 맞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질문 기술이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하는 과업이다.
멋지고 화려한 해결중심 질문을 달랑 몇 개 외워서 구사하고 난 후,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면? 이는 마치 크고 멋진 친구 집에 초청을 받아서 그 집 앞에 당도했는데 현관문만 빼꼼히 열었다가 닫는 행위와 같다. 당장 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 집 안에서 친구와 재미있게 놀아야 하는데, 허무하게 돌아서는 모습과 같다. 축배를 하려고 와인을 땄는데 싱크대 배수구에 그냥 버리는 모습과 같다.
이제, 첫 문단으로 돌아간다. 나는 여러분 누구나 해결중심 질문을 구사할 수 있다고 썼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 해결중심모델 전문가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근거는 단순하다. 만약에 그대가 그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고 호기심이 발동해서 '쓸 데 없는 말'을 하고 싶고, 그래서 (양석형처럼) 상대가 말한 내용 중에서 사소한 부분을 세세하게 질문한다면, 그대는 '이미' 해결중심모델 전문가다. 책에 실려 있는 '기적질문' 따위 몰라도 상관없다. 추상적인 개념은 몰라도 '이미' 몸으로 기적질문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무의식적으로 질문하던 습관을 의도적인 개입으로 의식화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상대에 관해서 품은 호기심을 구체적인 질문 테크닉으로 옮겨서 실천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긍정적인 대화를, 의도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 나갈 수 있을지 배우는 일이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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